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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ra 공부해보아요

Ana-Marija Markovina - C.P.E. Bach: The Complete Works for Piano Solo, Vol. 10

Ana-Marija Markovina - C.P.E. Bach: The Complete Works for Piano Solo, Vol. 10


C.P.E. Bach: works for piano solo, Wq57 & Wq118
C.P.E 바흐 Wq57 & Wq118
Bach, Carl Philipp Emmanuel 1714~88 독일

C.P.E. Bach: The Complete Works for Piano Solo, Vol. 10
℗ 2014 haenssler CLASSIC
Released on: 2014-04-29


Ana-Marija Markovina, piano

카를 필립 엠마뉴엘 바흐
Carl Philipp Emanuel Bach (8 March 1714 – 14 December 1788)
독일 태생의 바로크 작곡가.
칼 필립 엠마뉴엘 바흐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와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 사이에 생존한 자식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베를린의 바흐", "함부르크의 바흐"로 불려졌던 작곡가이다. 그는 로코코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고전주의를 개척한 음악가로 인정받고 있다.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보였고, 아버지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계승하여 나름대로 독자적 위치에 이르렀다. 그는 자서전에서 "나는 작곡과 건반악기 연주를 위해서 아버지 외에는 선생을 둔적이 없었다."고 썼다. 엠마뉴엘은 1723년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로 취임한 아버지를 따라 라이프치히로 이주해 형과 같이 토마스 학교에 입학하였다. 1731년에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고, 그 후 프랑크푸르트에서 공부를 계속하여 학위까지 받았으나 음악에 전념하고자 다짐을 하게 된다. 몇 달 후, 그는 형인 프리데만의 친구이자 아버지 바흐와 즉흥연주를 겨루었던 류트 연주가 실비우스 레오폴트 바이스(Sylvius Leopold Weiss)로부터 추천을 받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황태자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1740년 왕위 계승으로 대왕이 된 프리드리히 2세는 엠마뉴엘을 자신의 전속 반주자이자 베를린 궁정 예배당 하프시코드 연주자로 임명하였다. 훌륭한 플루트 연주자였던 왕은 월요일과 금요일(1주일 중 2일은 오페라를 연주하게 함)을 제외한 매일 저녁에 협주곡의 밤을 마련해서 직속 관현악단의 반주에 맞추어 협주곡을 연주했다. 이 당시 엠마뉴엘은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클라비어 연주가로서 정평이 나 있었고, 1731년에는 하프시코드와 클라비코드를 위한 약 30개의 소나타를 출판하기도 하였다. 1746년에는 실내악장으로 승진하여 바이올리니스트 그라운, 플룻티스트 콴츠 등과의 교류도 가졌다. 그러나 왕이 지나치게 굴종을 요구하여 관계가 점차 악화되었지만 어쩔 수 없이 계속 왕을 모시다가, 1767년에 결국 베를린을 떠나 함부르크 궁정의 음악감독(텔레만의 후임)으로 가게 되었다.
1767년에는 게오르그 필립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의 후임이 되기 위하여 함부르크로 떠났는데 여기에는 사연이 있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계속되는 전쟁으로 음악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었고, 음악에 대한 관심도도 자신의 플룻 선생이었던 콴츠에게로 기울어져서 엠마뉴엘의 직위에 소흘한 태도를 보였다. 1756년 파쉬(Johann Friedrich Fasch, 1688~1756)가 왕의 반주자로 발탁이 되었을 때 사직서를 제출하였으나 승낙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1767년 가까스로 허락을 받고 베를린을 떠날 수 있었다.
그동안 엠마뉴엘은 결혼을 했고(1744), <건반악기 연주법에 관한 소고, Versuch über die wahre Art das Klavier zu spielen>(1753~62)를 출판하는 등 작곡가·연주가·선생으로 다른 음악가들이 선망하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큰형인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와는 달리 아버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강력한 영향력을 나름대로 잘 소화해서, 이를 당시 새롭게 싹트고 있던 신양식에 연결시킴으로써 새로운 차원을 이룩했다. 이러한 그의 면모는 곧 과거와의 단절로 음악사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로써 기념비적이고 웅대한 바로크 음악은 동시대 사람들이 '감정과 다성'(Empfindsmkeit)이라고 즐겨 표현한 낭만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이 새로운 음악운동의 선두주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가르침과 본보기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으며, 아버지에게서 습득한 장인적 기교의 혜택을 입었다.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엠마뉴엘은 마그니피카트(1749), 부활절 칸타타, 교향곡, 세 권의 노래 모음집, 세속 칸타타 등을 작곡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클라비어용 작품에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 당시 그는 이미 200여곡의 소나타를 작곡하고 있었다. 그리고 1780년 세 번째 개정판으로 나온 <올바른 클라비어 연주법에 관한 시론, Versuch über die wahre Art das Clavier zu spielen>은 유럽 음악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1678년 함부르크 궁에서 궁정악장으로 임명된 엠마뉴엘은 교회 음악에 더욱 더 전념하였다. 그 다음 해에는 오라토리오 <사막의 이스라엘인들>를 완성하였으며 함부르크 이전 시대인 1668년부터 20년간 21개의 수난곡, 70개의 칸타타, 모테트와 다른 전례 음악 등을 작곡하였는데 여기에는 시민들의 취향에 맞는 연주회적 성격이 강하였다. 이 당시 엠마뉴엘의 기악 작품에서 등장하는 천재성은 요셉 하이든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만년에는 요하네움 라틴어 학교의 악장과 5개 주요 교회의 음악 감독을 겸임하였다. 이 당시 엠마뉴엘은 직무 이외에도 헨델의 <메시아>를 비롯한 대바흐, 글룩, 하이든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공개 연주회를 자주 가졌고, 궁정이나 교회에 의존하지 않고 연주나 작품의 출판 등을 스스로 개척하는 새시대의 작곡가상을 보여주었다.
그는 종교음악(성모 찬가 1곡, 수난곡 22곡 등), 교향곡, 협주곡(플루트, 하프시코드, 피아노, 하프시코드와 피아노, 오르간, 오보에 등을 위한 여러 협주곡들), 오르간 소나타, 실내악, 노래 등 수많은 곡들을 작곡했다. 베를린 시절의 작품들은 후원자였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보수적 성향으로 인해 다른 시기에 비해 다소 과거 지향적이었지만, 함부르크 시절에는 진취적인 성향을 보여 어느 시기보다도 미래지향적인 작품들을 썼다.
특히 그의 교향곡, 협주곡, 건반 소나타 등은 고전 '소나타 알레그로' 형식(줄여서 소나타 형식)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하이든, 모차르트와 베토벤에게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만년에는 후배 작곡가인 하이든의 영향을 받기도 했는데, 이것은 하이든이 만년에 젊은 모차르트의 영향을 받은 것에 비견할 수 있다. 그의 〈건반악기 연주법에 관한 소고〉는 이후 두 세대에 걸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쳐, 하이든은 이 책을 "논서 중의 논서"라고 극찬했으며, 모차르트는 "그는 대부이고 우리들은 그의 자식들"이라고 말했다. 한편 베토벤은 젊은 카를 체르니를 가르치면서 "엠마뉴엘 바흐의 논서를 반드시 읽을 것"을 요구했다. 이 책은 실제로 18세기 음악양식 및 해석방법을 이해하는 데 필수 서적으로 숫자표 저음, 장식음, 손가락 주법 등을 포괄하고 있을 뿐 아니라 18세기의 세련된 연주양식의 이해에 권위있는 지침서이다.
그가 남긴 작품은 오페라를 제외한 전분야에 걸쳐져 있으며 호모포닉한 주제의 취급, 균형잡힌 형식 감각 등 고전파 양식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참신한 조바꿈, 셈여림이나 템포의 급격한 변화 등은 다감 양식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아마추어 연주가들을 위한 많은 클라비어 소품들은 연주하기도 쉽고 기보 기술도 상세하다. 그의 클라비어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은 바로 <솔페지오 c 단조>이다.
[출처] ■ 카를 필립 엠마뉴엘 바흐, Carl Philipp Emanuel Bach (1714 - 1788)|작성자 빈들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
C.P.E.바흐 [1714.3.8~1788.12.15 독일]
Bach, Carl Philipp Emanuel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 사이에 생존한 자식 중 둘째 아들이다. 바흐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보였고 아버지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계승하여 나름대로 독자적 위치에 이르렀다. 그는 자서전에서 "나는 작곡과 건반악기 연주를 위해서 아버지 외에는 선생을 둔적이 없었다."고 썼다. 1735년 법학으로 프랑크푸르트에서 학위를 받았지만, 음악 이외의 직업을 가질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1740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베를린 궁정 예배당 하프시코드 연주자로 임명되었다.
훌륭한 플루트 연주자였던 왕은 월요일과 금요일(1주일 중 2일은 오페라를 연주하게 함)을 제외한 매일 저녁에 협주곡의 밤을 마련해서 직속 관현악단의 반주에 맞추어 협주곡을 연주했다. 왕이 지나치게 굴종을 요구하여 관계가 점차 악화되었지만 어쩔 수 없이 계속 왕을 모시다가 1767년에 결국 베를린을 떠나 함부르크 궁정의 음악감독(텔레만의 후임)으로 가게 되었다. 그동안 결혼을 했고(1744), 〈건반악기 연주법에 관한 소고 Versuch über die wahre Art das Klavier zu spielen〉(1753~62)를 출판하는 등 작곡가·연주가·선생으로 다른 음악가들이 선망하는 명성을 얻었다.
큰형인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와는 달리 아버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강력한 영향력을 나름대로 잘 소화해서 이를 당시 새롭게 싹트고 있던 신양식에 연결시킴으로써 새로운 차원을 이룩했다. 이러한 그의 면모는 곧 과거와의 단절로 음악사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로써 기념비적이고 웅대한 바로크 음악은 동시대 사람들이 '감정과다성'(Empfindsmkeit)이라고 즐겨 표현한 낭만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이 새로운 음악운동의 선두주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가르침과 본보기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으며, 아버지에게서 습득한 장인적 기교의 혜택을 입었다.
그는 종교음악(성모 찬가 1곡, 수난곡 22곡 등), 교향곡, 협주곡(플루트, 하프시코드, 피아노, 하프시코드와 피아노, 오르간, 오보에 등을 위한 여러 협주곡들), 오르간 소나타, 실내악, 노래 등 수많은 곡들을 작곡했다.
베를린 시절의 작품들은 후원자였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보수적 성향으로 인해 다른 시기에 비해 다소 과거 지향적이었지만, 함부르크 시절에는 진취적인 성향을 보여 어느 시기보다도 미래지향적인 작품들을 썼다. 특히 그의 교향곡, 협주곡, 건반 소나타 등은 고전 '소나타 알레그로' 형식(줄여서 소나타 형식)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하이든·모차르트와 베토벤에게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만년에는 후배 작곡가인 하이든의 영향을 받기도 했는데, 이것은 하이든이 만년에 젊은 모차르트의 영향을 받은 것에 비견할 수 있다. 그의 〈건반악기 연주법에 관한 소고〉는 이후 두 세대에 걸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쳐, 하이든은 이 책을 "논서 중의 논서"라고 극찬했으며, 모차르트는 "그는 대부이고 우리들은 그의 자식들"이라고 말했다.
한편 베토벤은 젊은 카를 체르니를 가르치면서 "에마누엘 바흐의 논서를 반드시 읽을 것"을 요구했다. 이 책은 실제로 18세기 음악양식 및 해석방법을 이해하는 데 필수 서적으로 숫자표 저음, 장식음, 손가락 주법 등을 포괄하고 있을 뿐 아니라 18세기의 세련된 연주양식의 이해에 권위있는 지침서이다.


Mikhail Pletnev
카네기홀 실황 녹음 이후로 완전히 피아니스트의 길을 걷기로 한 플레트네프의 새로운 야심작입니다. 메이저 레이블에서 한번도 녹음하지 않았던 C.P.E. 바흐의 건반곡들을 녹음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매우 주목할 만하죠. C.P.E. 바흐는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탐험되지 않은 오지같은 영역이었는데 바흐의 수많은 아들 중 C.P.E. 바흐가 건반에서 가장 뛰어났으며 유럽에선 그의 건반곡들이 많은 인기를 얻고 있죠. BIS에선 그의 건반곡을 모두 녹음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는데 국내엔 반향이 거의 없었고, 이제 메이저 레이블로 제대로 소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