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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ra 공부해보아요

시대별 서양 음악 감상하기 - 19세기 전반기 낭만주의 음악(상)

마리아 루이지 케루비니(Maria Luigi Cherubini 1740~1842), 조아키노 안토니오 로시니(Gioacchino Antonio Rossini, 1792 ~ 1868), 가에타노 도니체티(Domenico Gaetano Maria Donizetti, 1797~1848), 빈센초 벨리니(Vincenzo Salvatore Carmelo Francesco Bellini, 1802~1835).


이들은 모두 이탈리아 출신의 오페라 작곡가들이다. 당시 프랑스 파리의 음악계는 이들 이탈리아 작곡가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1). 루이지 체루비니(Maria Luigi Cherubini)는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태어나 반평생을 프랑스 파리에서 보낸 오페라 작가이다. 체루비니는 특히 오페라와 종교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베토벤은 그를 당대 최고의 작곡가로서 평가했다.

(1). Mé dée(메데)
1797에 작곡한 오페라이다. 전 3막의 오페라 코미크이다. 에우리피데스가 쓴 서사시 '메데이아(Medeia)'의 내용을 오페라로 만든 것이다. 대본은 프랑수아브누아 호프만(François- Benoît Hoffman)이 썼다. 무대는 코린토스이며 시기는 고대다.

베스트 아리아는 '아, 우리의 고통은 서로 나누리(Ah! nos peines seront communes)'(Ms), '당신의 아들들의 불행한 어머니를 보도다(Vous voyez de vos fils la mère infortunee)'(S), '무엇이라고? 내가 메데로다(Eh quoi! je suis Médée)'(S) 등이다.

(2). Les Deux Journées(Le Porteur d’Eau , Die Beiden Tage, 이틀간의 사건)
1800년에 작곡한 오페라로 3막의 서정적 코미디이다. 대본은 장니콜라 부이가 썼다. 이 오페라의 제목은 ‘물장수(The water carrier)’라고도 한다. 1800년 1월 16일 파리 페이도 극장(Théâtre Feydeau)에서 초연되었다.

베스트 아리아는 '이끌지 마소서(Guide mes pas)'(B)이다.

2). 안토니오 로시니(Gioacchino Antonio Rossini)는 19세기 전반 이탈리아 오페라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하며 벨칸토 낭만주의의 빛나는 음악을 꽃피웠다. 로시니는 특히 멜로디의 구성에 있어서 뛰어난 천재성을 보였다. 그의 멜로디는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아 ‘이탈리아의 모차르트’라는 별명이 붙었다. 1829년 서른일곱 살로 은퇴하기까지 그는 오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작곡가였다. 로시니는 39편의 오페라, 종교음악, 실내악, 가곡, 기악곡 등을 작곡했다.

(1). Barbiere di Siviglia(세비야의 이발사)
전 2막의 반항적 로맨틱 오페라이다. 대본은 보마르셰의 원작 '세비야의 이발사(Le barbier de Séville)'를 기본으로 체사레 스테르비니(Cesare Sterbini)가 썼다. 로시니는 오페라의 제목을 ‘알마비바’ 또는 ‘필요 없는 조심’으로 하려고 했다. 당시 조반니 파이시엘로(Giovanni Paisiello)가 같은 스토리로 '세비야의 이발사'라는 오페라를 작곡해 인기를 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과 구분하려고 했던 것이다. 줄거리로 보자면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 이 오페라의 전편이다. 1816년 2월 20일 로마 아르젠티나 극장(Teatro Argentina)에서 초연되었다.

베스트 아리아는 '조금 전에 들은 소리(Una voce poco fa)'(S), '나는 이 마을의 만능 재주꾼(Largo al factotum della città)'(Bar), '나 같은 선생에게는(A un dottor della mia sorta)'(T), '비방(La calunnia)'(Bar), '보라, 하늘에서 웃으리(Ecce ridente in cielo)'(T) 등이다.

(2). La Cenerentola(Cinderella, 라 체네렌톨라)
프랑스어로 작곡한 2막 6장의 오페라 부파이다. 대본은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의 '상드리옹(Cendrillon, 작은 유리 신, La petite pantoufle de verre)'을 기초로 야코포 페레티(Jacopo Ferretti)가 썼다. 1817년 1월 25일 로마의 발레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베스트 아리아는 '한 마리 벌처럼(Come un ape... Ma al finir)'(S), '걱정하고 불평하기 위해 태어났네(Nacqui all’affanno, al pianto)'(Ms), '이젠 슬프지 않아요(Non piu mesta)'(S) 등이다.

(3). Moïse et Pharaon(Mosé in Egitto , Moses in Egypt, 모세와 파라오)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 스타일의 대서사시로 전 3막의 종교적 비극이다. 1818년 완성했으나 이듬해에 수정해 다시 완성했다. 구약성경 출애굽기의 이야기와 프란체스코 린기에리(Francesco Ringhieri)의 희곡 '오시리스(L’Osiride)'를 바탕으로 안드레아 레오네 토톨라(Andrea Leone Tottola)가 대본을 썼다.


베스트 아리아는 '당신의 수많은 별과 같은 권좌로부터(Dal tuo stellato soglio)'(B), '영원하도다! 광대무변하도다. 불가해한 여호와의 뜻(Eterno! immenso! incomprensibil dio!)'(B), '불꽃더미(Involto in fiamma)'(S) 등이다.

(4). Guillaume Tell(Guglielmo Tell, William Tell, 기욤 텔)
'모세와 파라오'처럼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 스타일의 대서사시이다. 오리지널은 5막이었으나 나중에 3막을 삭제하고 4막과 5막을 합해 3막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희곡을 빅토르조세프 에티엔 드 주이(Victor-Joseph Étienne de Jouy) 등이 합작해 대본으로 만들었다.

베스트 아리아는 '아, 마틸드, 내 영혼의 우상(Ah! Mathilde, idole de mon âme)'(T), '움직이지 마라!(Sois immobile!)'(Bar), '세습적인 피난(Asile héréditaire)'(T) 등이다.

3). 가에타노 도니체티(Domenico Gaetano Maria Donizetti)는 롬바르디아의 베르가모(Bergamo)에서 태어났다. 도니체티의 오페라는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는 약 70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1). Lucia di Lammermoor(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전 3막의 비극(dramma tragico)이다. 영국의 문호 월터 스콧의 소설 '래머무어가의 신부(The bride of Lammermoor)'를 기본으로 살바도레 캄마라노(Salvadore Cammarano)가 대본을 썼다.

베스트 아리아는 '드디어 나는 당신의 것(Alfin son tua)'(S, 광란의 장면), '쓰라린 눈물 흘리리라(Spargi d’amore pianto)'(S), '밤의 장막이 드리울 때(Regnava nel silenzio)'(S), '그의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나를 감싸주었는데(Il dolce suono mi colpi di sua voce)'(S), '죽음만이 나의 피난처(Fra poco a me ricovero)'(T), '루치아의 카바티나(Lucia’s cavatina)'(S), '향을 피우는데(Ardon gl’incensi)'(S), '그대에게 향한 나의 눈길(Verranno a te)'(S+T), '잔인하다, 얼마나 그리워했던가(Cruda, funesta smania)'(T), '날개를 펴고 하늘로 간 그대여(Tu che a Dio spiegasti l’ali)'(T) 등이다.

(2). L’elisir d’amore(사랑의 묘약)
1832년에 작곡해서 그해 5월 12일 밀라노 리리코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전 2막의 멜로드라마이다. 대본은 본래 외젠 스크리브가 다니엘 오베르의 'Le philtre(미약)'을 위해 쓴 글을 펠리체 로마니가 고쳐 썼다.

베스트 아리아는 '남몰래 흘리는 눈물(Una furtiva lagrima)'(T),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Quanto è bella, quanto è cara)'(T), '무정한 이졸데(Della crudele Isotta)'(S), '마을 사람들이여, 들으시오(Udite, udite, o rustici)'(B), '가서 장난기 많은 바람에게 물어보아요(Chieldi all’aura lusinghiera)'(S), '나는 돈이 많고 그대는 아름답다(Io son ricco, e tu sei bella)'(S+T) 등이다.

(3). La Fille du Régiment(The Daughter of the Regiment , La Figlia del Reggimento, 연대의 아가씨)
전 2막이다. J.바야르와 생 조르지의 프랑스어 대본에 따라 작곡하였다. 1840년 2월 파리에서 초연되었다. 1815년 나폴레옹의 군대가 전투를 치른 티롤지방을 무대로, 어려서 전쟁터에 버려진 처녀를 프랑스 병사가 구조하여 연대의 마스코트로 삼아 귀염둥이가 되는데, 이 여주인공 마리의 사랑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베스트 아리아 '모두 알고 있네(Ciascun le dice)'(S), '떠나가야 해요(Convien partir)'(S), '어찌할 수 없는 약속을 위해... 아, 프랑스여 안녕(Pour ce contrat fatal... Ah! Salut a la France)'(S), '나는 가야 하네(Il faut partir)'(S), '아, 나의 친구(Ah, mes amis)'(T), '모두 알고 있네(Chacun le sait)'(연대의 노래) 등이다.

(4). La Favorita , The Favorite(라 파보리타)
전 4막의 그랜드 오페라이다. 대본은 알퐁스 루아예(Alphonse Royer)가 썼으며, 외젠 스크리브가 몇 군데 추가했다. 1840년 12월 2일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무대는 중세 스페인으로,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린 가엾은 여인의 이야기다.

베스트 아리아는 '오, 나의 페르난도(O mio Fernando)'(S), '사랑스러운 처녀여, 주의 천사여(Una vergine, un’angel di Dio)'(T), '그 같은 사랑을 위해(A tanto amor)'(B), '부드러운 마음(Spirto gentil)'(T), '하늘과 같은 자비(Pietoso al par del nume)'(S) 등이다.

4). 빈센초 벨리니(Vincenzo Salvatore Carmelo Francesco Bellini)는 시칠리아의 카타니아에서 태어나 34살에 파리 근교의 퓌토(Puteaux)에서 세상을 떠난 이탈리아의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다. 벨리니는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의 중심 인물로 아름답고 유연한 멜로디로 인해 ‘카타니아(Catania)의 백조’라고 불렸다.

(1). I Capuleti e i Montecchi(The Capulets and the Montagues, 카풀레티가와 몬테키가)
전 2막 6장의 서정적 비극이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기본으로 펠리체 로마니가 대본을 썼다. 1830년 3월 11일 베네치아 페니체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벨리니의 오페라는 메조소프라노 파트에도 상대적으로 많은 비중을 둔다.

베스트 아리아는 '오 얼마나 많이(O quante volte)'(S), '로메오가 그대의 아들을 죽였다면(Se Romeo t’uccise un figlio)'(Ms) 등이다.


(2). La Sonnambula(The somnambulist , The Sleepwalker, 몽유병자)
전 2막이다. 프랑스 극작가 외젠 스크리브와 장피에르 오메르(Jean-Pierre Aumer)가 발레-판토마임으로 쓴 '새로운 신사의 도착(L’arrivée d’un nouveua seignueur; La sonnambule)'을 펠리체 로마니가 오페라 대본으로 만들었다. 벨리니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흠뻑 음미할 수 있는 작품이다. 1831년 3월 6일 밀라노 카르카노 극장(Teatro Carcano)에서 초연되었다.

베스트 아리아는 '사랑하는 친구들(Care compagne)'(S), '아, 믿을 수 없어라, 꽃이 저렇게 빨리 시들다니(Ah! non credea mirarti)'(S), '오, 알 수 없는 인간의 생각이요(Ah! non giunge uman pensiero)'(S) 등이다.

(3). Norma(노르마)
전 2막의 서정적 비극으로 경우에 따라 4막으로 공연되기도 한다. 대본은 알렉상드르 수메(Alexandre Soumet)의 산문 비극을 기본으로 펠리체 로마니가 썼다. 무대는 기원전 50년경 로마제국 관할하의 고대 갈리아(골, 지금의 프랑스 동부 지방)다. 서정적 아름다움이 넘치는 드라마틱한 작품이다. 1831년 12월 26일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베스트 아리아는 '정결한 여신(Casta Diva)'(S), '언덕으로 가라, 드루이드들이여(Ite sul colle, o Druidi)'(B), '꿈속에 빠져들어(Dormono entrambi)'(S) 등이다.

(4). Beatrice di Tenda(Beatrice of Tenda, 텐다의 베아트리체)
전 2막의 서정적 비극이다. 대본은 펠리체 로마니(Felice Romani)가 카를로 테달디포레스(Carlo Tedaldi-Fores)의 소설 '행복한 로마인(Happy roman)'을 기본으로 했다. 하지만 내용은 행복하지 않다. 1833년 3월 16일 베네치아 페니체 극장(Teatro la Fenice)에서 초연되었다.

베스트 아리아는 '아, 그대가 한때 나를 사랑했다면(Deh! se mi amasti un giorno)'(S)이다.

(5). I Puritani(The Puritans, 청교도)
전 3막의 멜로드라마 세리오(Melodramma serio)이다. 자크프랑수아 앙슬로(Jacques-François Ancelot)와 조제프 자비에르 보니파스(Joseph Xavier Boniface)가 공동으로 집필한 '둥근 머리와 기사들(Têtes rondes et cavaliers)'이라는 희곡을 기본으로 카를로 페폴리(Carlo Pepoli) 백작이 썼다. 벨리니의 마지막 오페라인 '청교도'는 벨칸토 테크닉의 아름다운 아리아가 전편을 수놓는다. 1835년 1월 24일 파리 이탈리앵 극장(Théâtre- Italien)에서 초연되었다.

베스트 아리아는 '당신의 상냥한 목소리가(Qui la voce sua soave)'(S), '그대, 오 사랑하는 이여(A te, o cara)'(T), '나는 귀여운 처녀(Son vergin vezzosa)'(S), '아, 영원히 그대를 생각하며(Ah! per sempre io ti perdei)'(B) 등이다.

2.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 ~ 1828)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로 음악의 최고봉 중 한 사람이다. 관현악곡, 교회 음악, 실내악, 피아노곡 등 명곡이 많다. 19세기 독일 리트(가곡) 형식의 창시자로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슈베르트는 31세로 요절했음에도 600여 편의 가곡을 작곡하여 가곡의 왕이라고 불린다. 13편의 교향곡과 소나타, 오페라 등도 작곡했다. 하지만 그는 베토벤과 같은 구성력이 결여되어 기악곡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1). Der Erlkonig D.328(마왕)
슈베르트가 18세 때인 1815년에 만든 '마왕'은 한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곡이다. 슈베르트는 대부분의 가곡에 동시대의 작가나 시인들의 텍스트를 사용했다. 특히 자신의 음악에 가장 큰 영감을 준 괴테의 시에 70여 편의 음악을 붙였다. 슈베르트의 첫 번째 가곡인 '물레감는 그레트헨' 역시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것이다. 가곡 '마왕' 역시 1782년에 창작된 괴테의 시를 텍스트로 삼은 곡이다.

2). Symphony No.8 in B minor, D.759 'Unfinished'(교향곡 제8번 '미완성')
교향곡의 역사에서 ‘미완성으로 완성’된 곡은 많다. 하지만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 가장 유명하다. '미완성' 교향곡은 1822년 10월 22일 슈베르트가 작곡에 착수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슈베르트는 1악장과 2악장을 작곡하고 나서 3악장 작곡을 시작했으나, 20마디까지만 관현악 편성 작업을 한 채 작곡을 중단했다. 그 뒤 작곡 작업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지휘자인 요한 헬베크가 이 곡을 발견해 초연한 것은 1865년 12월 17일의 일이었다. '미완성' 교향곡은 40여 년 동안 잠자고 있었던 셈이다.


3). Moments musicaux Op.94 D.780(악흥의 한때)
슈베르트가 1828년에 작곡한 '악흥의 한때' 작품94는 즉흥풍의 소품 6곡을 간추린 독주곡이다. 슈베르트의 피아노곡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이다. 모두 즉흥적인 음의 이미지를 간소한 형식으로 엮은 곡이며, 순식간에 엷게 사라져 가는 악상이 매력적이다. '제3번'이 가장 유명하고, '제1번'과 '제2번'도 아름다운 소품이다.

4). Streichquartett No.14 ‘Der Tod und das Mädchen’(String Quartet in D minor, No.14 'Death and the Maiden'(현악 4중주 D단조, ‘죽음과 소녀’)
슈베르트의 3곡의 현악 4중주곡 중에서 최고의 걸작이다. 제2악장이 1817년에 만든 가곡 '죽음과 소녀'(실내악곡)의 반주 선율을 주제로 한 변주곡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게 되었다. 작곡 당시 슈베르트는 불치병에 걸려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4개의 악장 전부가 단조로 된 이 곡에는 어둡고 아름다운 로맨틱한 정서가 넘쳐 있다. 유작이기 때문에 작품 번호는 없다.

5). Arpeggione Sonata A minor D.821(Sonata for Arpoggine and Pianoin A minor,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A단조)
슈베르트가 1824년에 작곡한 3악장 소나타이다. 1823년에 빈의 슈타우퍼(Staufer)가 개발한 악기 아르페지오네를 위해 쓴 소나타이다. 아르페지오네는 작은 첼로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날에는 사용되지 않아 첼로로 연주된다. 깊은 맛은 없지만 상쾌하고 즐거운 악상이 매력적이다.

6). Quintett ‘Die Forelle’ D.667, Op.114(피아노 5중주곡 A장조 '송어')
슈베르트가 22세 때인 1819년에 작곡한 실내악곡이다. 전 5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4악장에 자작의 가곡 '송어'를 주제로 한 아름다운 변주곡이 들어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 같은 해 여름 슈베르트는 친구인 명가수 포글러와 함께 북 오스트리아로 연주 여행을 갔다. 그때 슈타일에 사는 첼리스트이자 열렬한 음악 애호가로서 광산업자인 바움가르트너 집에 묵었는데 그의 의뢰를 받아서 쓴 곡이라고 한다. 악기 편성은 다소 이색적이며, 제2바이올린을 생략하고 콘트라베이스를 사용하고 있다.

7). Die Winterreise, D.911(겨울 나그네)
슈베르트가 1827년에 작곡한 곡이다. '겨울 나그네'는 1827년 3월 4일 슈베르트의 친구인 프란츠 폰 쇼버의 집에서 처음으로 연주되었다. 당시에는 전곡의 반 정도 밖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후 슈베르트는 빌헬름 뮐러가 쓴 노래 열두 곡을 더 발견해 곡의 순서를 다시 정했다. 그는 뮐러의 시 중에서 가장 침울한 것들을 모아 끝부분에 놓았다. 가장 마지막 곡은 슈베르트의 가곡 중에서도 가장 쓸쓸한 허디거디 악사의 노래인 '길가의 악사'이다.

목차는 제1곡 '잘 자세요(Gute Nacht)', 제2곡 '풍향 깃발(Die Wetterfahne)', 제3곡 '얼어 붙은 눈물(Gefrorne Tränen)', 제4곡 '마비(Erstarrung)', 제5곡 '보리수(Der Lindenbaum)', 제6곡 '넘치는 눈물(Wasserflut)', 제7곡 '냇가에서(Auf dem Flusse)', 제8곡 '회상(Rückblick)', 제9곡 '도깨비 불(Irrlicht)', 제10곡 '휴식(Rast)', 제11곡 '봄꿈(Frühlingstraum)', 제12곡 '고독(Einsamkeit)', 제13곡 '우편 마차(Die Post)', 제14곡 '백발(Der greise Kopf)', 제15곡 '까마귀(Die Krähe)', 제16곡 '최후의 희망(Letzte Hoffnung)', 제17곡 '마을에서(Im Dorfe)', 제18곡 '폭풍이 부는 아침(Der Stürmische Morgen)', 제19곡 '환영(Täuschung)', 제20곡 '이정표(Der Wegweiser)', 제21곡 '여인숙(Das Wirtshaus)', 제22곡 '용기(Mut)', 제23곡 '환상의 태양(Die Nebensonnen)', 제24곡 '거리의 악사(Der Leiermann)'로 구성되어 있다.

8). Die schöne Müllerin Op.25(아름다운 물레방앗간의 아가씨)
슈베르트가 26세 때인 1823년에 작곡한 가곡집이다. 슈베르트 최초의 가곡집인 동시에 낭만파로서도 최초의 가곡집이다. 그해 봄 슈베르트는 친구의 집을 찾아갔는데, 마침 외출 중이었다. 친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당시 인기 시인 빌헬름 뮐러의 '발트호른 주자의 유고에서의 시집'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친구의 귀가도 기다리지 않고 뮐러의 시집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 작곡에 착수한 것이 바로 이 가곡집이다.

목차는 제1곡 '방랑(Das Wandern)', 제2곡 '어디로(Wohin?)', 제3곡 '멈춰라(Halt!)', 제4곡 '시냇물에의 감사(Danksagung an den Bach)', 제5곡 '일을 마치고(Am Feierabend)', 제6곡 '호기심이 강한 사내(Der Neugierige)', 제7곡 '초조(Ungeduld)', 제8곡 '아침 인사(Morgengruss)', 제9곡 '물레방앗간의 꽃(Des Müllers Blumen)', 제10곡 '눈물의 비(Tränenregen)', 제11곡 '나의 것(Mem!)', 제12곡 '휴식(Pause)', 제13곡 '초록빛 리본으로(Mit dem grünen Lautenbande)', 제14곡 '사냥꾼(Der Jäger)', 제15곡 '시샘과 자랑(Eifersucht und Stolz)', 제16곡 '좋아하는 빛깔(Die liebe Farbe)', 제17곡 '싫어하는 빛깔(Die böse Farbe)', 제18곡 '시든 꽃(Trockne Blumen)', 제19곡 '젊은이와 시냇물(Der Müller und der Bach)', 제20곡 '시냇물의 자장가(Des Baches Wiegenlied)'이다.

내용은 '고용살이 기간을 마치고 기능공이 되기 위해 방랑의 길을 떠난 젊은이가 아름다운 아가씨가 있는 물레방앗간에서 견습공으로 일하게 된다. 어느 새 그 아가씨를 열렬히 사모하게 되지만 연적의 출현으로 절망하고, 시냇물의 자장가를 들으면서 영원한 잠을 잔다'는 줄거리의 곡이다.

9). Schwanengesang(백조의 노래)
슈베르트가 1828년에 작곡한 가곡집이다. '아름다운 물레방앗간의 아가씨', '겨울 나그네'와 함께 슈베르트 3대 가곡집의 하나이다. 제3곡 '봄의 동경(Frühlingssehnsucht)', 제4곡 '세레나데(Ständchen)', 제5곡 '나의 집(Aufenthalt)', 제8곡 '아틀라스(Der Atlas)', 제11곡 '도시(Die Stadt)', 제12곡 '바닷가에서(Am Meer)', 제13곡 '그림자(Der Doppelgänger)', 제14곡 '비둘기 전령(Die Taubenpost'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곡 시기는 처음의 13곡이 1828년 8월, '비둘기 전령'이 10월로 되어 있다. 처음 7곡의 가사는 렐슈타프, 그 다음 6곡은 하이네, 마지막 '비둘기 전령'은 자이들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백조의 노래'는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난 얼마 후, 빈의 악보 출판업자 하슬링거가 작곡자 마지막 해의 작품 14곡을 모아 출판한 것이다. 연작 가곡으로서 슈베르트가 최후에 도달한 경지를 나타낸 주옥 같은 곡들이다. 백조는 죽기 직전에만 운다는 전설에 따라서 이름 붙인 '백조의 노래'라는 속칭도 슈베르트의 유작집에 어울린다고 하겠다.

10). Impromptus(즉흥곡)
슈베르트가 1827년에 작곡한 기악곡이다. 슈베르트의 '즉흥곡'은 타고난 서정성과 뛰어난 표현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곡이다. 슈베르트는 네 곡으로 이루어진 첫 번째 세트 대신 두 번째 세트에 '즉흥곡'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가장 표현력이 뛰어난 연주는 포르투갈 출신의 피아니스트 마리아 조앙 피레스로 알려져 있다. 그녀가 연주하는 즉흥곡은 드라마틱한 사건과 시적인 감흥에 흠뻑 젖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3. 펠릭스 멘델스존(Jacob Ludwig 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 ~ 1847)
펠릭스 멘델스존은 독일의 초기 낭만파 시대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오르가니스트, 지휘자이다. 멘델스존은 하이든이 죽은 해인 1809년 2월 3일 독일의 함부르크(Hamburg)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한 유태인 은행가, 조부 모제스(Moses)는 특이한 철학자였다. 멘델스존은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장남이었는데, 누나 파니(Fanny)도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멘델스존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지휘자가 되어 고금의 명곡과 신작을 소개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유럽 제1급의 악단으로 키웠다. 그는 고전주의 낭만파 음악의 대작곡가라는 명성과 함께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음악은 명쾌하고도 아름다우며, 시각적이면서도 우아한 낭만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베토벤, 브람스의 곡과 함께 3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손꼽힌다.

멘델스존이 바흐를 세상에 알린 공적은 매우 크다. 1829년 바흐가 죽은 뒤 방치되었던 ‘마태 수난곡’을 발견하여 초연했다. 그의 유명한 작품도 바흐의 고전 음악 연구를 통해서 나온 것이 많다. 멘델스존은 낭만파의 선구자이자 신고전파의 길을 열음으로써 음악사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 Italienische Symphonie(이탈리아교향곡)
'이탈리아교향곡'은 멘델스존의 '교향곡 제4번 A장조(작품번호 90)'의 통칭이다. 전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831년 이탈리아에서 작곡하기 시작하여 1833년 베를린에서 완성했고, 런던에서 멘델스존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받은 밝은 인상을 바탕으로 쓴 교향곡이며, 마지막 악장은 19세기 이탈리아의 대중적 무곡 살타렐로(saltarello)를 인용하였다.


2). Schottische Symphonie(스코틀랜드교향곡)
멘델스존의 '교향곡 제3번 A단조-장조(작품번호 56)'의 통칭이다. 전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5개의 교향곡 중 제4번 '이탈리아교향곡'과 더불어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1829년 멘델스존이 스코틀랜드를 여행했을 때 착상했지만, 이 교향곡이 완성된 것은 1842년이다. 따라서 제3번 교향곡이 사실상 그의 마지막 교향곡이다. 대체로 고전적 교향곡의 구성을 따르고 있으나 4개의 악장이 연속적으로 연주되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3). Die Fingals-Höhle Op.26(서곡 '핑갈의 동굴' Op.26)
멘델스존이 1832년 작곡한 관현악곡이다. 1829년 멘델스존은 런던 연주 여행에서 돌아오던 길에 스코틀랜드를 들러 헤브리디즈 군도 스태퍼 섬에 있는 핑갈의 동굴을 보았다. 핑갈의 동굴을 보고 느낀 놀라운 풍경을 그린 연주회용 서곡으로 ‘헤브리덴(Hebriden)’ 서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그너가 이 곡을 듣고 멘델스존을 ‘제일류의 풍경화가’라고 칭했을 정도로 묘사 음악의 걸작이다.

4). Violin concerto in e minor, opus.64(바이올린 협주곡 마단조, 작품번호 64)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1838년 부터 1845년 사이 작곡된 그의 마지막 대규모 오케스트라 작품이다. 1845년 3월 13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페르디난드 다비드에 의해 초연되었다. 역대 가장 사랑받는 바이올린 협주곡 중 하나다. 이 협주곡은 바이올리니스트라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작품이다.

구성은 제1악장 Allegro molto appassionato(매우 열정적이고 빠르게), 제2악장 Andante(느리게), 제3악장 Allegretto non troppo - vivace(조금 빠르나 지나치지 않게 - 활기차게) 등 3악장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모든 악장이 쉼없이 계속 연주되는 등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혁신적인 기법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5). Songs without Words(무언가, 無言歌)
'무언가'는 멘델스존이 1825~1845년 사이에 작곡한 48곡의 기악곡이다. '무언가'는 가곡처럼 선명한 선율을 담고 있으며, 짧지만 완성도가 매우 높은 곡들의 연작이다. 또한 다양한 개성, 감정의 폭과 깊이, 피아노곡의 본질, 거칠 것 없는 상상력을 모두 보여 준다. 주관적이고 서정적인 낭만주의 음악의 대표작인 '무언가'는 낭만주의 시대의 새로운 음악 장르인 ‘서정적 성격소품(lyrisches Charakterstück)’의 정립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무언가' 중 대표적인 곡은 '사냥의 노래(Op.19의 3번)', '베니스의 뱃노래(Op.19의 6번)', '봄노래(Op.62의 6번)' 등이다. '사냥의 노래'는 사냥의 나팔소리를 암시하는 전주로 시작하여, 나팔소리의 울림과 그 메아리가 곡의 중간에 출현한다. '베니스의 뱃노래'에서는 곤돌라를 젓는 리듬을 암시하는 반주가 아주 인상적이며, 그 위에 이탈리아의 민요를 연상시키는 선율이 전개된다. '봄의 노래'는 장식음을 절묘하게 사용하여 멘델스존의 천재성을 엿보이게 하는 작품이다.

6). Variations sérieuses(엄격 변주곡)
'엄격 변주곡'은 멘델스존이 1841년에 작곡한 기악곡으로 그의 가장 중요한 피아노곡에 속한다. 이 곡은 구슬프고 진지해서 비통한 합창곡 같은 분위기가 난다. 친구 슈만이 1835년에 쓴 '교향적 연습곡'과 공통되는 부분도 있다. 총 열일곱 개의 변주곡은 뒤로 갈수록 기교가 더 복잡해진다. 장조는 14번 밖에 없을 정도로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둡고 음울하다. 대위법적 선율로 볼 때 멘델스존이 바흐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변주곡의 종결부에는 낭만주의 정신이 한껏 고양되어 있다.

멘델스존의 피아노곡은 무상함, 가벼움, 명징함이 그 특징이다. 이 곡의 진중하면서도 변덕스러운 분위기를 잘 포착하는 피아니스트는 머레이 페라이아이다. 그는 멘델스존 작품의 핵심인 고전주의의 절제와 낭만주의의 감수성 사이의 균형을 완벽하게 실현하였다.

7). Organ Sonata(오르간 소나타)
(1). Organ Sonata No.1 in F minor Op.65
(2). Organ Sonata No.2 in C Minor Op.65
(3). Organ sonata No.3 in A major Op.65
(4). Organ Sonata No.4 in Bb Major op.65
(5). Organ Sonata No.5 in D Major op.65
(6). Organ Sonata No.6 in D minor Op.65

멘델스존이 1844년에 작곡한 6개의 오르간 소나타 Op.65는 낭만시대의 대표적인 바로크 양식이다. 그는 이 작품에 바흐의 오르간 음악을 연상케 하는 코랄 변주, 푸가, 대위법 등을 사용하였다. 1845년 4월 20일 프랑크푸르트의 카타리넨 교회에서 6개의 오르간 소나타를 초연하였다.

8). Preludes & Fugues op.35(전주곡과 푸가)
4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단조로운 화성과 낭만적인 푸가라고 할 수 있다. 바흐에 대한 존경심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9). Oratorio 'St. Paul' op.36(오라토리오 '성 바울')
'성 바울'은 멘델스존이 1836년에 작곡한 오라토리오이다. ‘성 바울’은 스테판 집사의 순교 장면을 시작으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지저스 크라이스트를 만나 변화되는 사울, 이후 바울의 사역 등을 담고 있다.

10). Symphony No. 2 in B flat major, Op. 52 'Lobgesang'(교향곡 2번 '찬가')
'찬가'라는 표제가 붙은 '교향곡 2번'은 구텐베르크가 활판 인쇄를 시작한 지 40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기 위해 1840년 작곡된 작품으로 성악가 3명의 독창과 혼성 합창, 관현악이 곁들여진 대작이다.

11). Oratorio 'Elijah' Op.70(오라토리오 '엘리야')
멘델스존의 오라토리오 '엘리야'는 헨델의 '메시아', 하이든의 '천지창조'와 더불어 오라토리오 3대 걸작에 꼽힌다. 이 곡은 구약성서의 '열왕기'에서 소재를 따왔으며, 예언자 엘리야를 중심으로 야훼를 찬양하고 있다. 멘델스존은 '성 바울'을 완성하고 나서 이 곡을 만들기 시작하여 1846년에 완성했다. 1846년 8월 26일 영국의 버밍검에서 초연되었다.

곡은 전 2부로 나뉜다. 제1부는 이방의 신바르를 몰아내어 야훼의 노여움을 풀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는 이야기이며, 제2부에서는 박해를 피해 달아난 엘리야가 야훼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대성업을 이루고 승천한다. 합창곡 '신에게 감사하라'와 '그 때 그대의 빛 나타나리라'가 가장 뛰어나다.

12). Ein Sommernachtstraum Op. 21, 61-1~5(A Midsummer Night’s Dream, 한여름 밤의 꿈)
멘델스존이1826년 ~ 1842년에 작곡한 관현악곡이다. 구성은 서곡, 스케르초, 간주곡, 녹턴(관현악곡), 결혼 행진곡 순으로 되어 있다. 멘델스존은 17세 때 피아니스트인 누나 파니와 함께 당시 독일에서 널리 소개되고 있었던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처음으로 접했다. 특히 그를 사로잡은 것은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피아노 4손용의 서곡을 쓰고, 다시 관현악용으로 편곡해서 상연했다. 악기 편성은 표준적인 2관 편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4. 로베르트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1856)
로베르트 슈만은 1810년 6월 8일 독일의 작센 츠비카우에서 태어났다. 그는 6세 때 처음 음악공부를 시작했고, 1822년에 시편 150절에 곡을 붙임으로써 최초로 작곡을 했다.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연습 중 손가락을 다쳐 작곡가를 지망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피아노 음악, 가곡(리트), 관현악곡의 작곡가로 유명해졌다. 슈만은 ‘신음악 시보’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음악 평론 활동도 하면서 쇼팽을 부각시키고 브람스를 소개했다.

슈만의 대표적인 피아노곡들 중에는 1840년 아내가 된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을 위해 작곡한 곡들이 많다. 그는 빈으로 건너가 당대의 유명한 피아노 선생이었던 프리드리히 비크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비크에게는 9세 된 딸 클라라가 있었다. 클라라를 사랑하게 된 슈만은 그녀의 18번째 생일에 비크에게 허락을 받아 1840년 9월에 결혼을 했다. 그는 그해 2~12월 동안 ‘시인의 사랑’, ‘여인의 사랑과 생애’, ‘리더 클라이스’, ‘미르테의 꽃’ 등 그의 유명한 가곡들 대부분을 작곡했다. 1840년은 소위 슈만의 '가곡의 해'였다. '미르텐', 하인리히 하이네와 요제프 아이헨도르프의 시에 곡을 붙인 2개의 '가곡집', '여인의 사랑과 생애' 등과 같은 연가곡들도 작곡했다. 하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1856년 정신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슈만이 죽은 후에도 부인 클라라는 피아니스트로 활약하면서 그의 작품을 소개했다. 슈만의 가곡은 시에 대한 깊은 해석과 높은 지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피아노 반주부를 특히 중요시하여 멜로디의 반주를 넘어서 노래의 일부분으로 간주했다. 슈만은 시와 노래, 피아노를 일체화한 작곡가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 Symphony no.1, Op. 38 'Spring'(교향곡 제1번, ‘봄’)
슈만이 1841년에 작곡한 교향곡이다. 전체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슈만 자신이 ‘봄의 교향곡’이라 이름 붙인 곡으로 전곡에 행복감이 넘친다. 각 악장의 주요 악상은 제1악장의 주제와 관련지어 배치되고, 전 악장과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3년 전 발견한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9번' 창작의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2). Sinfonie No.3 ‘Rheinische’ Op.97(Symphony No.3 in Eb major, Op.97 'Rhein', 교향곡 제3번 E플랫장조 '라인')
슈만이 1850년에 작곡한 교향곡으로 전체 5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850년 9월 슈만은 오랫동안 살았던 드레스덴을 떠나 뒤셀도르프의 지휘자로 취임했다. '교향곡 제3번'은 이때 라인 지방을 여행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작곡되었다. 전체적으로 라인 지방의 민속적인 분위기가 짙고, 특히 자신이 ‘장엄한 의식의 성격으로’라고 적은 제4악장에는 쾰른 대성당의 축전에서 받은 강한 인상이 담겨 있다. 슈만의 교향곡은 화려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별로 인기가 없다. 하지만, '교향곡 제3번'은 민속적이고 친숙한 분위기로 사랑받는 교향곡이다. 악기 편성은 표준적인 2관 편성이지만, 4개의 호른과 3개의 트롬본이 두드러진다.

3). Concerto for Piano and Orchestra in a minor, Op.54(Piano concerto in A minor, Op.54, 피아노 협주곡 a단조 Op.54)
'피아노 협주곡 a단조'는 처음에 따로따로 만들었다가 나중에 합쳐서 한 개의 협주곡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1845년 겨울 드레스덴의 음악회에서 부인 클라라에 의해 연주되었다. 1847년 1월의 공개 초연에서는 슈만이 관현악을 지휘하고 부인이 피아노를 쳤다. 아름다운 음의 대조, 심각한 인상을 주는 음량과 음색, 피아노와 관현악의 균형이 잘 잡혀 있어서 듣는 이에게 큰 감명을 느끼게 한다.

제1악장 Allegro affettuoso는 피아노와 관현악의 힘찬 연주가 인상적이다. 제2악장 간주곡-Andante grazioso는 피아노와 관현악이 느긋하게 대화하는 듯이 진행하여 감미롭고 명랑한 느낌을 준다. 제1악장에서 긴장한 마음을 전환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제3악장 Allegro vivace는 음의 색채가 눈부시게 변화하고, 주제는 늠름하고 밝은 사냥 노래를 사용하였다. 최고조에 달한 연주에서 슈만의 정열과 우아함을 마음껏 느낄 수 있다.

4). Kinderszenen, Op.15(어린이 정경 Op.15)
피아노곡 '어린이의 정경 Op.15'는 13개의 소곡으로 이루어진 유명한 피아노곡으로 슈만의 동심을 담은 걸작이다. 소박하고 로맨틱하고 기품이 있는 작품이다. 이 중 '트로이메라이'가 가장 유명하다. 1838년 작이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할 수 있는 피아노곡이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미지의 나라들, 2. 이상한 이야기, 3. 술래잡기, 4. 졸라대는 어린이, 5. 만족, 6. 큰 사건, 7. 꿈(트로이메라이), 8. 난로가에서, 9. 목마의 기사, 10. 약이 올라서, 11. 거짓말, 12. 어린이는 잠잔다, 13. 시인의 이야기이다.

5). Etudes Symphoniques Op.13(교향적 연습곡 Op.13)
슈만의 친구 프리켄의 아버지는 음악 애호가였다. 프리켄이 슈만에게 하나의 주제를 내놓고 비평을 청한 적이 있었다. 그 주제에 흥미를 느낀 슈만은 여러 가지 의견을 말했으며, 그 주제를 기초로 해서 많은 변주곡을 썼다. '교향적 연습곡'은 이렇게 태어났다. '교향적 연습곡'은 영국의 젊은 음악가 베네트에게 헌정되었는데, 끝곡에서 베네트의 마음가짐을 담아 마르시너의 가극 '성당 기사와 유태 여인' 속의 가극을 가락으로 한 것이 나온다. 슈만의 풍부한 감정과 환상, 독특한 악풍이 스며있는 작품이다. 1834년 작이다.

6). Carnaval op.9(사육제 op.9)
슈만이 1835년에 작곡한 피아노곡이다. 슈만은 장 파울의 소설 '장난꾸러기 시절'로부터 영감을 얻어 '나비'(1831년)에서 상상의 가장무도회가 주는 인상을 그렸다. 3년 뒤에 나온 스물한 곡으로 구성된 '사육제'도 역시 무도회를 그렸다. 주요 손님은 슈만의 약혼녀 에르네스티네 폰 프리켄이었다. 슈만은 약혼녀의 교향인 아슈(Asch)의 철자를 독일식 음계 이름 대로 바꾸었다(A-Eb-C-B 혹은 Ab-C-B로). 이런 모티브들은 '사육제' 곳곳에 조심스럽게 나타나며, 10번 곡 ‘ASCH-SCHA’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모티브들은 ‘스핑크스’라는 수수께끼 같은 이름을 달고 소리 없이 조용히 등장하기도 한다. 보이기는 하되 연주되지는 않는다.

'사육제'의 여러 곡 속에는 에르네스티네 뿐만 아니라 슈만의 또 다른 에고들도 담겨 있다. 시적인 에우제비우스와 열정적인 플로레스탄이 그것이다. 무도회에는 쇼팽과 파가니니도 음악으로 표현되어 있고, 코메디아 델아르테에서 따온 인물들도 출연한다. 마지막 부분은 왈츠가 들어갈 자리에 장난스럽게 행진곡이 배치되어 있다.

7). Dichterliebe op.48(시인의 사랑 op.48)
슈만이 1840년 하이네의 시를 바탕으로 쓴 16곡으로 구성된 가곡집이다. '시인의 사랑'은 1 '아름다운 5월에', 2 '나의 눈물에서', 3 '장미·나리·비둘기에게', 4 〈당신의 눈동자를 바라볼 때〉, 5 〈나의 마음을 나리꽃 품 안으로〉, 6 〈신성한 라인의 물줄기에〉, 7 '나는 슬퍼하지 않으리', 8 '꽃이 안다면', 9 '울리는 것은 플루트와 바이올린', 10 '연인의 노래를 들을 때', 11 '젊은이는 소녀를 사랑하고', 12 '밝은 여름 아침', 13 '꿈 속에서 나는 울었다', 14 '밤마다 꿈 속에', 15 '옛이야기 속에서', 16 '지겨운 추억의 노래' 등 16곡으로 이루어졌다.

처음 6곡은 젊은이의 사랑의 기쁨, 다음 8곡은 실연의 슬픔, 마지막 2곡은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회상을 노래하고 있다. '여자의 사랑과 생애'(1840)와 더불어 슈만의 대표적 연작가곡이다. 피아노 반주가 종래의 반주 개념을 벗어나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낭만파 가곡의 최고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세기 낭만주의 음악
서론 낭만파 음악 (1) 슈베르트 (2) 멘델스존 (3) 슈만 (4) 쇼팽 (5) 브람스 (6) 베버 (7) 베를리 오즈 (8) 리스트 (9) 바그너
서론

낭만주의란 사조가 한마디로 요약하기 어려운 만큼 내가 평소에 가장 좋아하는 음악 분야로 주제를 잡았으며 그 시대에 유명한 작곡자들과 낭만주의의 전반적인 특성을 조사해 보았다. 이 조사로 인해 낭만주의의 음악 뿐만 아니라 미술이나 문학, 연극의 특성까지 두루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낭만파 음악

문학 및 예술에 있어서 낭만주의 운동은 19세기의 중요한 특질이다. 음악사에서의 낭만주의운동은 과거의 위대한 업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우리들의 음악생환에도 깊은 뿌리를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이해는 그 만큼 중요성이 크다고 아니할 수없다. 중세 세계의 공통어였던 라틴어의 입장에서 보아 지방 어에 해당하는(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통용된) '로맨스'어로 쓰여진 공상적 기사이야기를 내용으로 하는 서사시를 로맨스(romance), 또는 로맨(roman)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형용사가 로맨틱(romantic)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말로 옮겨져서 '낭만적'이라는 단어가 생기게 된 것이다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은 사실상 낭만적 요소에 독일적 특성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시대양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독일에서 성장 발달한 낭만적인 음악이념, 악곡의 구성원리, 작곡기법 등이 '전형적'인 것으로 인정되고 존중되었다는 것을 명심해둘 필요가 있다(19세기 말기에 가까워질수록 프랑스라든가 그밖에 국민 악파의 여러 양상이 대두되기는 하지만). 그러므로 우리들은 일단 독일을 중심으로 해서 여러 문제를 생각해 보는 것이 편리할 줄 안다.

1770년경 초기 독일 낭만주의는 처음은 문학에서 나타났고 젊은 괴테, 헤르더, 실러 등이 대표자로 손꼽히는데 그 일반적 특징으로서는 전통에 대립되는 태도, 자유의 갈망, 개성적 국민적인 것의 존중, 먼 과거 특히 중세적인 것에 대한 동경 등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낭만주의 문학의 특색이 조금 뒤 음악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이다.

독일 낭만주의 미학의 기초는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판단력 비판'에서 처음 명시되었다. 그의 학설에 따르면 예술의 근원은 이성이나 지성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감정에 있으며, 특히 음악은 논리적 개념에 의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정신의 감동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이 음악을 감각의 언어라고 본 그의 근본사상은 모든 낭만파음악의 초석이 된다. 낭만주의 음악이 이 감각언어의 다이나믹한 운동에 의해서 긴장, 유동, 발전의 과정을 표현하려 한 것은 발전(Entwicklung)의 관념을 중심으로 하는 피테, 헤겔, 셀링, 쇼펜하우워 등의 낭만주의 철학과 상통하는 시대사상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18세기 후반기부터 음악에서 쓰여지기 시작한 '낭만적'이란 용어를 꼭 '고전적'이란 것에 대한 대립개념으로 생각해야 할것인가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지 않다. 18세기 후반기 베토벤과 동시대의 사람이었고 소설가작곡가 음악평론가였으며 낭만주의 예술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호프만(E.T.A Hoffmann,1776~1822)은 빈 고전파 기악작품이 가지는 음악적 표출력을 '로맨틱'이라고 부른 바 있고 제5번 (r운명'을 논평하는 글에서 「음악은 모든 예술중에서 가장 낭만적인 예술이다. 아니 진정 낭만적 유일의 예술이라고 말해도 좋다. 왜냐하면 무한한 것만이 예술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라고 쓰고 있다. 이때 '무한한 것'이라는 것은 시각적 구체적인 한계성에 묶이지 않고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비상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지성적 '깨달음'에 더욱 많이 의존하는 문학이나 조형예술에 대비시켜 감각적 '느낌'에 보다 많이 호소하는 추상적인 음예술에서 상상력은 무한히 펼쳐지게 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낭만주의 예술의 진수는 바로 음악이라고 하겠는데 문학비평가 페이터(Walter Pater)가 「모든 예술은 음악적 상태를 갈망한다」 라고 말한 것은 위와 같은 음악특성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중세에 있어서 음악은 산수, 기하, 천문학과 함께 기초4학과로 간주되었으며 또한 감각적 쾌락의 대상이 아니고 지적 인식의 학문이라는 사상이 지배하는 긴 시대가 있었다는 것은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시대, 어떤 개인 또는 그 개인의 작품속에서도 지성적 질서를 강조하는 경향을 고전적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감정의 충동을 앞세우는 경향을 낭만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낭만적 경향이란 것은 19세기 이전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아르스 안티콰에 대립시켜 아르스 노바를, 르네상스에 대비시켜 바로크를 '낭만적'이라고 형용해도 틀리지는 않는다. 또한 바하의 '반응계적 환상곡과 푸가', 모짜르트의 '마의 피리', 베토벤의 많은 후기 작품에 있어서의 낭만적 요소는 아무도 부정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낭만주의 음악' 또는 '낭만파 음악'이 성립되는 것은 이른바 낭만적 경향이 예술작품의 형식과 내용을 결정할 만큼 강력해졌으며 이러한 것이 일정한 음악시대의 특징으로 간주될 때에 한해서이다.

1750년 바하의 죽음을 경계선으로 하는 '바로크'에서 '고전'에의 양식변천처럼, '고전'에서 '낭만'에서 이행은 납득될만한 중요한 사건이나 사실을 찾아낼 수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작곡기법에서 보아도 1770~1900년에 작곡된 모든 음악은 멜로디, 리듬, 화성, 그리고 이러한 것을 총체적인 질서에로 묶는 음악형식이 모두 공통의 원리 위에서 서 있다. 1770년경의 모짜르트는 1900년경의 말러의 음악으로 이해하는 데에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음악학자 블루메(Frid rich Blume, 1893~1975)는 유명한 '음악적 총서'에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는 음악사에서 하나의 통일체를형성하고 있다」 라고 말하고 낭만주의라는 것은 단정적으로 정의 지울 수 있는 음악양식이 아니고 하나의 정신적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18, 19세기를 묶어서 '고전적 낭만양식의 시대'라고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또한 아인시타인(A Ifred Einstein, 1880~1952)은 슈베르트를 독일 낭만파 음악의 첫 번째 인물로 간주하지 않고 'the romantic classic'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 음악은 고전주의 음악과는 다른 다음 몇 개의 특색을 갖고 있음도 또한 사실이 아니 할 수 없다 낭만주의 음악이 나타내는 의미내용으로서는 '일상생활적이 아닌 상상의 세계를 추구하며, 따라서 공간적 시간적으로 아득하고 무한한 것을 동경하게 된다'라고 요약할 수 있으며 따라서 신비한 것, 신기한 것, 공상적인 것, 경이적인 것, 나아가서는 기교적인 것을 피하여 소박한 것 까지도 구태여 찾으려 한다.

이러한 의욕이공간적으로 펼쳐져서는 자연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향토적, 민속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연가곡집 '물방앗간의 아가씨', 오페라 '마탄의 사수') 민요 멜로디에 대한 각별한 애착으로써 나타나며, 한편 이국적인 것을 동경하게 되어 서양지역 아닌 민족음악의 여러 요소가 이용된다. 한편 이러한 의욕이 시간적으로 거슬러 올라가서는 복고적 취미로 나타나는데 바하의 바로크 스타일의 재인식 이라든가 중세 기사적인 것인 소재(오페라 '탄호이저')등을 지적할 수 있다.

낭만주의 음악의 창작태도는 형식적 질서나 논리적 구성보다는 자유로운 표출의지를 앞세운다는 것을 우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낭만파의 많은 작곡가들이 형식적 구속력이 강한 소나타의 형식원리를 자유롭게 변형시키거나 또는 그다지 애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이것에 대신해서 멘델스존, 슈만, 쇼팽의 경우처럼 소곡 또는 이러한 것을 자유롭게 묶은 조곡의 형태가 유행하게 된다.

다음으로 고전파 음악이 엄격히 지켜왔던 자율적 구성원리를 포기하고 음악외적인 타율적 원리를 끌어들였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즉 타 예술, 특히 시와 직접 결부시키거나 또는 문학적 상상을 음악창작의 근원으로 삼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부터 낭만파 음악의 특징적인 장르인 슈베르트에서 비롯되는 예술가곡과, 멘델스존 슈만 등이 이룩한 표제성을 띤 피아노 소품의 조곡, 그리고 베를리오즈에서 비롯되는 표제음악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음악을 감상하려면 '음악 그 자체'를 듣는 것만으로서는 아무래도 불충분하며 시, 회화, 자연 등의 이른바 음악외적인 상상력이 직접 간접으로 참여해야 되는 것이다.

낭만파 작곡가의 창작심리 내지 창작의 방법을 본다면 주관적, 개인적, 자기 고백적이었다는 것이 지적된다. 고전파 작곡가들이 이른바 보편적인 이념을 바탕으로 해서 국제적 인류적 성격의 음악을 작곡하는 이른바 '창조자의 입장'에 있는데 반해서 낭만파 작곡가들은 그 개인의 꿈과 사랑, 기쁨과 괴로움의 체험감정 바로 그것이 작곡의 동인이 되었으며 그것을 자전적으로 고백했다. 이러한 주관적 개인적인 것의 강조가 작곡가 자신이 속해 있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관심과 직결되어(특히 음악적 후진국가에서는) 이탈리아 독일 등의 음악적 지배력에 반대하는 국민주의 음악으로 번져나간 것은 오히려 필연적인 추세였다고 말할 수 있다.

19세기 낭만주의음악시대는 자유주의와 민주주가 크게 성장해 가는 시민사회의 시대였다. 군주와 귀족의 음악을 보호하던 시대는 지나갔고 많은 시민청중을 위한 공개연주가 성행했다. 따라서 연주예술의 사회적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다. 악기의 발명과 개량, 연주편성의 확대, 최고의 기교를 자랑하는 비르투오즈(vi티uoso)의 등장 등은 이 시대의 두드러진 성장이라 하겠다. 시민사회를 위한 공개연주라는 것과 일반 애호가는 접근하기 어려운 기교주의의 성행이라는 약간 아이러니컬한 현상이 공존했다. 또한 낭만주의 정신과 일치하는 것이기도 한데 '과거에의 관심'이 음악사학의 발달을 촉구했으며 높은 교양을 갖춘 호프만, 슈만, 바르너, 베를리오즈 등은 음악평론에도 힘을 기울였다. 특히 형식미학을 옹호한 한슬릭(Fduard Hanslick) 과 감정미학 내지 내용미학을 옹호한 암브로스(August Wilhelm Ambros)의 '음악과 시의 한계'(Bie Grenzen der Musik und Poesie)는 음악비평의 두 개의 관점을 밝힌 셈이 된다.

전자는 브람스의 절대음악을, 후자는 베를리오즈 바그너 등의 표제음악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 낭만적 교향곡은 빈고전파 작곡가, 특히 베토벤이 교향곡의 정신과 작곡기법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낭만파 고유의 특색이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인데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지적 구성에의 관심보다는 감정과 정열에 더욱 좌우되었으며, 형식미보다는 멜로디와 화성의 아름다움을 중시했으며, 음색효과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가졌고, 주제의 논리적 구성적 전개보다는 즉흥적 평면적 확대에 기울어진다. 또한 표제적 경향을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을 경우에도 이모저모로 나타나있음을 느끼게 한다.

낭만파 피아노 음악의 일반적 특징으로서는 소타나 론도 등의 형식에 즉흥적 환상적 요소를 끌어 넣었으며 따라서 베토벤에서 보는 바와 같은 형식적 견고성과 논리적 일관성을 잃게 된다. 이른바 심포직한 주제보다는 전개에는 부적당한 가곡풍의 주제를 애용한다. 음악외적 판념이 자극이 되어 표제적인 성격을 띨 경우가 많다. 작은 규모와 형식으로 된 악곡이 개발된다. 미묘한 기본의 교현을 위해서 화성이 정교, 섬세화된다는 것이다.

(1) 슈베르트

소위 빈 고전파의 3인 작곡가가 모두 다른 곳에서 모여온 사람들인데 비해서 슈베르트(Franz Schube탄 1797~1828)는 빈에서 태어났고 거기에서 살았고 거기에서 죽었다. 베토벤의 예술이 그 당시의 시대사상과 깊은 관계를 가진 것인데 비해서 슈베르트의 그것은 빈의생애와 문화속에서 성장했으므로 그야말로 '빈의 아들'이라 불리워질 만하다.

가난한 학교교사의 14명이나 되는 자식중의 한사람으로 태어난 슈베르트는 어린 시절 궁정 소년합창단에서 노래 불렀고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so~1825)로부터 화성학을 지도받았다 그 뒤 얼마동안 임시 교사직을 맡았지만 이내 고정직이라는 것과는 인연을 맺지 않고 자유로운 작곡생활을 한평생을 보내게 된다. 그는 19세기 예술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보헤미안의 첫 예에 속하며, 여기저기 정다운 친구집을 떠돌아 다니고 가난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하면서도 베토벤다운 의자의 행동 없이 청춘의 애환에 몸을 적시면서 살았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처지를 스스로 비참하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자연발생적인 창작능력을 가지면서도 스스로의 작곡에 대해서 무비판적이었다는 것도 아마 이러한 성격에 기인한 것이라 불 수 있다. 31세라는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난 그의 묘비에는 「음악은 여기에 풍성한 보배, 그러나 아직 한층 더 훌륭한 희망을 매장하였다」 라고 새겨져 있다.

슈베르트의 음악적 감각과 기질은 분명히 낭만주의자라는 것을 나타내지만 그의 창작의 기반은 고전파 음악이었다. 베토벤은 그의 으뜸가는 존경의 대상이었고 임종 때에도 베토벤 곁에 묻히기를 원했을 정도이다. '낭만적 고전주의자'라는 용어는 그의 음악의 특성을 나타내준다. 그의 가장 뛰어난 특질은 자연발생적으로 꾸밈없는 무진장한 멜로디의 발명력이다. 이러한 것이 시와 결합되어 예술적 향기 높은 독일가곡(Lied)의 장르를 확립하게 된 것이다.

형식구조보다 멜로디의 아름다움을 앞세우는 이러한 가곡 창작정신으로서 이른바 피아노 소품이라는 것을 작곡했는데, 이점에 있어서도 낭만파 피아노 음악의 첫 선행자라고 불리워질만하다. 그는 또한 큰 규모의 악곡에 있어서는 형식적 구성이 허약한 대신 서정적 가창성을 끌어 넣어 낭만적 교향곡, 낭만파 피아노 소나타의 원형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슈베르트는 천성의 서정시인이었다. 그의 무진장한 멜로디 발명능력에 대해서는 「그는 광고쪽지에도 작곡을 한다」 라고 슈만이 약간 비꼬았을 정도이다.

그러나 천재 슈베르트의 감정을 풍부하고 환상을 다양하다. 음에 대한 감각을 놀랄만큼 예민했으며, 색채감각은 섬세하고 전조의 기법을 대담하고 또한 교모하다. 장조와 단조의 갑작스런 변화에서 그는 감정의 명암을 미묘하게 나타내었다. 요컨대 그는 음악의 서정시인으로서 음악의 극작가인 베토벤과 어깨를 나란히 해서 한 시대의 음악이상의 한쪽을 대표하고 있다.

(2) 멘델스존

북독일 함부룩에서 부유하고 교양 있는 유태인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난 멘델스존(FelixMendelssohn, 1809~1847)은 타고난 음악적 재능과 조직적인 교육에 힘입어 9세 때 공개 연주, 11세 때 작곡을 시작했으며 17세 때에는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에 의한 유명한극음악을 쓰기까지 되었다. 그런데 이 악곡이, 다른 작곡가들과는 달리, 자기 저택에서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일요음악회의 프로그램에 넣어 곧 연주되었다하니 그의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행복을 오히려 유별나다고까지 할 수 있다.

또한 아름답고 상냥한 아내와 착한 아이들에 둘러싸였고 그가 좋아하는 즐거운 여행을 통해서, 예컨대 이탈리아와 영국여행에서, 음악적 소재를 얻어 좋은 작품을 남기기도 하는 일거양득의 생활을 했다. 여기에 그는 높은 교양과 조화있는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열과 깊은 명상과는 거리가 멀어 때로는 안일, 평범, 단순함이 지적되기도 한다 하지만 변함없는 세련, 요정다운 경쾌, 절도와 우아함이 착실한 형식구성에 담겨있다는 점에서 그는 역시 위대한 음악가로 손꼽힐만 하다.

음악에 대한 멘델스존의 정신적 자세는 옛 것의 숭상, 즉 상고의 경향을 지니고 있다. 바하와 헨델을 존경했으며 바하의 '마태 수난곡'을 초연 이후 100년만에 재연주한 것도 이러한 정신의 발로이며 또한 그의 음악에는 대위법적 양식이 많이 쓰이기도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슈만과 닳은 점이 있다. 멘델스존은 또한 관현악과 피아노로써 정경을 묘사하는데 뛰어났다.

(3) 슈만

멘델스존의 밝고 행복한 생애 옆에서 슈만(Robe기 Shumann, 1810~1856)의 그것은 너무나 격정적이고 또한 비극적으로 보인다. 슈만은 음악적인 조숙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요구에 따라 처음은 법률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청소년 시절에 음악 못지 않게 탐닉한 쟌 파울, 호프만, 뤼케르트, 아이헨도르프 등의 문학은 그의 음악을 특성 지우는소재적 요인이 되기도 한다. 20세 때 음악에의 길을 확정짓고 프리드리히 비크로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나 손가락 장애를 일으켜 작곡으로 전향하게 된다.

또한 고난을 겪고 맺어지는 클라랄 비크와의 사랑의 이야기는 낭만적인 로맨스로 남아있으며 또한 그의 음악창작에 중요한 의미를 가져다 주었다. 그는 작곡에 전념하면서도 동지들과 음악신보(Neue Zeitschriftfur Musik)를 설립하여 창조적인 비평을 통해서 당시의 속물근성을 비난하고 훌륭한 음악을 정당히 옹호했다. 「모자를 벗으시오 천재가 나타났습니다」 라는 유명한 문구로 시작되는 비평을 통해서 쇼팽을 독일에 소개했고, 또한 청년 브람스의 작품에 대해서 새로운 길을 찾아준 것도 슈만의 공적이었다.

그러나 유전 때문인지 격렬한 감정생활 때문인지 그는 정신병에 시달리게 되었고 1854년에는 라인강에 투신자살을 기도할 만큼 병은 악화되었으며, 스스로 원해서 입원을 했으나 2년 뒤 거기서 죽었다. 그의 생애는 정말 시적 환상과 이상의 높이를 추구하는 낭만주의자의 그것이었으며 아름답고 격력하고 또한 비극적이다. 슈만의음악의 특성을 바로 '시적'이라는 말로써 표현이 된다. 그의 작품은 음악적으로 구성되었다기보다 시적으로 노래 부르고 있다. 거기에는 음악적 논리에 의한 건축이라기보다 환상을 자유롭게 노래하는 시의 세계가 있다.

그러므로 슈만의 특유의 영역이 구성적인 큰 악곡이 아니라 서정적 소곡이라는 데는 곧 이해가 갈 줄 안다. 그의 멜로디는 섬세하고 영감에 차 있으며 바하의 음악을 존중하면서도 그의 악곡구성은 자유롭고 대담하다. 그리고 그가 충분한의사표시를 할 수 있는 매체는 피아노의 건반과 인성의 독창에 있어서였다. 그의 작곡경력은 조감 특이하여 20세 때부터 처음의 10년 동안은 피아노에만 집중되었고, 1840년에는 가곡한 분야에만 집중되었다. 다음으로는 교향곡, 실내악곡, 오라토리오 등으로 향하는 따위의 것이었다. 대체로 말해서 그는 감정적 낭만적인 것에서부터 출발해서 점차로 구성적인 고전과 바로크에로 접근했다고 할 수 있다.

(4) 쇼팽

쇼팽(Frederic Chopin, 1810~1849)은 프랑스 사람을 아버지로 폴랜드 사람을 어머니로 해서슈만과 같은 해인 1810년 폴랜드 바르샤바 근교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예술생애는 슈만과 다른 성질로서의 비극적인 것이었다. 8세 때 공개연주를 열어 천재성을 보여준 쇼팽은 모짜르트의 재생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했다. 1829년에 이어 다음해 두 번째 빈에 들렀을 때 조국 폴랜드의 혁명, 러시아의 압정에 반대하는 투쟁과 그 실패를 알게 된다.

그는 예술의 서울 파리에 가서 결국 그곳을 영주의 땅으로 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파리생활에서 그는 품위있는 태도와 뛰어난 재능 때문에 상류사회의 친구를 얻게 되고 악단에서의 지반도 확고하게 되었다. 그러나 섬세한 성격과 고독한 환경을 폐병과 함께 그의 죽음을 재촉하고 말았다. 그의 무덤에는 그가 줄 곳 간직해 온 한 줌의 풀랜드의 흙이 뿌려졌다.

그의 생애를 특징지우는 것으로서는 여류 작가 조르쥬 상드(Geoge Sande)와의 10년이 넘는 애정생활과 줄곧 그를 괴롭혀온 폐병과, 돌아갈 수 없는 폴랜드에 대한 격렬한 애국심 등을 들 수 있다. 쇼팽의 음악은 다음 3개의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조국 폴랜드의 음악특성이나 전설에서 영감된 폴로네이즈, 마주르카 그리고 발라드가 있으며, 다음으로는 녹턴, 왈츠 등에서 나타나 있는 우아하고 세련되고 화사한 프랑스적인 에스프리를 나타내는 측면이 있다. 세 번째로는 낭만적 예술가로서의 인간표출의 측면인데 스케르쪼, 환상곡, 소나타, 협주곡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바하를 비롯한 독일 고전파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가 그의 음악표현의 근거가 되었으며 여기에서부터 독자적인 양식을 개척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쇼팽의 멜로디는 매혹적이고 감각적이며 특히 절묘한 장식악구는 멜로디의 본질에까지 끌어올려져 있다. 그리고 피아노로써 인성에 못지 않는 '칸타빌레'의 성취는 일찍이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쇼팽은 화성에 있어서도 반음계법과 변화음의 교묘한 사용으로써 얻어진 명암이 엇갈리는 미묘한 색채효과로서 낭만적 작곡기법에 중요한 것을 공헌했다. 예컨대 베토벤은 피아노에서 심정의 다이나믹한 표출을, 리스트는 관현악적인 화려한 교과를 기대했다.

그러나 쇼팽은 피아노만이 가지는 매력적 음향의 모든 가능성을 남김없이 끄집어 내었다는 데에 그의 고유한 위치가 있다. 특히 피아노 음악의 비밀이라 할만한 페달의 용법을 그는 본능적으로 터득했다. 음량을 늘인다든가 음을 지속시킨다든가 하는 것 이외에 색채적분위기를 조성하는 페달의 용법을 그는 가장 효과적으로 들려주며 미묘한 감각의 세계로 우리들을 인도한다. 쇼팽의 감정영역은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관능적이기도 하다. 슬라브적인야성과 프랑스적인 세련이, 북국적인 어둠과 남국적인 밝음이, 그리고 정열과 우수, 동경과고독이 그의 음악 안에서 공존한다. 그의 모든 작품이 비할 바 없이 시적이라는 표현은 정당하겠지만 그러나 여성적이라고 한마디 말로써 규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5) 브람스

낭만파 음악시대에 있어서 고전주의적 이상을 끝내 버리지 않아, 음악사적으로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는 음울한 북방 함브록에서 태어났지만 청년시절부터 자은 분위기의 빈에서 생애를 보냈다. 고독한 내성적 성격 때문인지 끝내 결혼과 오페라 작곡과는 인연을 갖지 못했지만 그 음악적 질에 있어서 베토벤 이후의 최
대의 작곡가로 평가될 만하여 실제 뷜로(nins Burlow)는 그를 바하, 베토벤과 묶어서 위대한 '3B'라고 불렀다. 무명의 음악청년 브람스를 악단에 소개한 것은 슈만이었으며 브람스는이 은혜를 평생 잊지 않았다.

한두번 합창 지휘자로 일한 것, 몇 번 여행을 떠난 것 이외에 그는 빈을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세속적인 영광을 멀리한 채 수도자와 같은 태도로 묵묵히 작곡에 전념했다. 그의 성격은 완고하고 때로는 우울했지만 그러나 그 인간성 자체는 소박하고 온후하고 또한 성실했다 브람스의 음악적 특색은 바하를 포함한 고전파 음악을 언제나 모범으로 삼아 고전적 형식구조를 존중했으며, 그 당시를 풍미하던 표제음악적 경향과는 날카롭게 대립했다. 본질적으로 그는 서정적 작곡가이며 내면적인 그 무엇을 깊은 정감으로 나타내었고 강렬한 극적 표현을 외면했다. 또한 본질적으로 그는 소박과 단순성에 혈연적 공감을 느꼈는데 이러한 것은 그가 민요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했다는 것과 질은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6) 베버

낭만파 음악은 음악구성의 요소로서 타 예술, 특히 문학을 끌어들인다는 것을 으뜸가는 특색으로 하는데, 슈베르트는 시와의 결합에서 가곡을, 베버는 그 대본에 의해서 오페라를 작곡함으로써 독일 낭만파 음악의 첫 대표자가 되었으며 또한 낭만파 음악의 두 경향의 출발점에 서 있다. 베버(Carl Maria von Weber, 1786~1826)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조직한 악단과 함께 여러 지방을 돌아다녔으며 성장한 뒤에도 떠돌이 음악생활을 계속되었다. 이러한 생활환경 때문에 낭만적인 자연과 민속예술을 접촉할 기회가 많았고 국내, 국외의 많은 오페라도 경험하게 되었다. 베버는 또한 음악 문필에도 뛰어나 있었으며 19세기 음악비평의 선구자중의 한 사람이다. 또한 그는 근대적 관현악법과 지휘법의 기초를 확립했다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병약의 체질과 긴장 과로가 겹친 그의 생활은 폐병까지 겹치게 되어 40이라는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7) 베를리 오즈

낭만파시대의 표제음악의 대가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1869)는 청년시절 의학을 포기하고 베토벤, 글룩 등을 연구하는 한편 프랑스 낭만파 문학 뿐만이 아니라 셰익스피어, 바이런, 특히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런데 26세의 가난한 음악청년에게 운명적인 사건이 생기는데 아일랜드 출신의 배우 해리엣 스미드슨에 대한 폭발적인 사랑을 느끼게 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랑은 그의 '환상교향곡' 작곡의 동기가 되기도 한다. 그는 성격적으로 괴팍하여 상식을 넘는 언동이 많았으며 분화구와 같은 불타는 성격은 연애를 연애하게 하고 꿈과 환상에 몸을 맡긴 생애를 보내게 했다. 그의 뛰어난 창조력과 상예를 벗어난 과대한 표현법은 프랑스 땅에서는 냉대를 받았으나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오히려 외국에서 큰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베를리오즈가 19세기 프랑스 음악사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는 전통적으로 독일 이탈리아 영향권에 놓여있는 프랑스 음악을 그들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프랑스 낭만주의 음악의 전형이며 또한 위대한 개척자가 되었고 그자신의 예술적 특성을 표출함으로써 바그네리즘에서부터 프랑스를 건져내어 자립적인 길을 걷게 했다.

베를리오즈는 음악외적인 관념을 웅변적이고 표정적인 관현악기법을 사용해서대담하게 표출한 낭만파 최초의 대가이다. 베를리오즈 없이 근대의 색채적 관현악법을 생각할 수 없는데 이에 관한 그의 이론은 그의 저서 '근대악기용법 및 관현악법'(1884)에 체계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는 고전적인 질서와 균형이라든가 서정적 내향성 등 낭만파의 섬세한 감각을 무시했으며 그 대신 극적 표현력이 풍부한 관현악 기법을 통해서 그로테스크한 신기함, 기괴한 현상을 나타내어 청자를 미지의 음악세계로 끌어들인다. 그의 음악은 언제나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풍기며 형식과 표현법에 있어서 독보적인 그 무엇이 있다. 위에서 적은 베를리오즈의 고유한 특성이 가장 훌륭하게 나타나 있는 걸작이 바로 표제교향곡인 “환상교향곡'(Symphonie fantastiaue, 1830)이다.

(8) 리스트

베를리오즈가 창시한 표제적 교향곡을 더욱 발전시켜 교향시라는 위대한 창조에 도달한 인물이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이다. 그러나 그는 베를리오즈와는 달리 어린 시절 피아노의 신동이라고 불리워 질 정도였으며 피아노의 연주기교를 예상도 못할 정도로 높이 끌어올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리스트의 예술생애를 대체로 구분지워 본다면 파리를 활동 근거지로해서 화려하고 기교적인 피아노 음악을 작곡한 시기, 바이마르의 궁정 악장의 직위를 가지면서 신 독일악파의 중심적 인물로서 뛰어난 관현악곡을 작곡하여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시기, 로마를 정주지로 하고 바이마르, 부다페스트 등지를 왕래하면서 종교음악에 전념하던 시기로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리스트는 매우 복잡한 인간형을 가졌으며 화려 분방한 사회생활과 만년에는 경건한 신앙인으로서 로마교황으로부터 수도원장의 호칭을 얻는 등 리스트의 사회생활, 정신생활 그 자체가 낭만주의의 특징을 대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한편 그는 관용의 미덕을 가지고 있었는데 망명중인 바그너와 불우한 베를리오즈를 적극 도운 것도 이러한 그의 성격을 잘 나타내어 주는 일이라 하겠다.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기교는 훔멜(Johann Nepomuk Hummel, 1778~1837)과 체르니(Karl Czerny, 1795~1857)의 계열과 연결되는 것으로 여기에 베를리오즈의 대담한 표제음악적 착상, 파가니니의 신선하고 효과있는 기교, 쇼팽의 서정성과 템포 루바토를

그 나름대로 종합해서 관현악파인 음울림을 가지는 최고의 연주기교를 개발했다.

(9) 바그너

? 소년기 (1813~1882) :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의 생애는 그야말로 낭만적 소설처럼 파란만장하며 이러한 것은 또한 그의 예술발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배우인 계부 가이어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는데(바그너가 8세때 죽었음) 이 무렵 베버의 '마탄의 사수'에 큰 감명을 받았다. 소년기에 들어서자 문학에 열중했으며 셰익스피어를 모방해서 비극 드라마를 써 보기도 했다.

14 15세 경 처음으로 베토벤의 교향곡을 듣게 되는데 여기에 감격한 나머지 음악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고 뒷날 자기 자신이 여러번 말한바 있다. 18세때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음악과 철학을 청강했으며 또한 교향곡을 습작하기도 했다.

? 방랑시 (1832~1842) 19세의 청년 바그너는 빈 프라하를 여행하는 동안 습작 오페라 '결혼'(Hochzeit)을 쓰는데 작사작곡의 첫 예가 되는 셈이다 정신적 불안을 안고 여러 곳을 편력하는 가운데 연상의 배우 민나 플라너와 결혼하지만 부채를 남긴 채 둘이는 폭풍의 고난을 겪고서 런던을 거쳐 파리에 도착한다. 이때의 경험은 '방랑하는 흘랜드인'에 도움을 주었다. 여기서 불우한 생활을 하고 잇는 동안 독일에서 그의 오페라 '리엔찌'(Rienzi), '방랑하는 홀랜드인'이 공연된 것을 계기로 귀국한다.

? 궁정 지휘자시대 (1842~1849) : 위의 두 오페라의 공연의 공적으로 드레스덴 궁정악단의 지휘자의 자리를 얻는다. 이어서 '탄호이저', '로엔그런'등 낭만적 오페라에서 높은 명성을 얻게 된다. 때마침 1849년 프랑스의 2월혁명이 드레스덴에 파급되자 평소 정치적 혁신사상을 갖고 있던 그는 자기의 신분도 망각한 채 총을 들고 혁명에 가담했으며 마침내 국외에도 피함으로써 체포를 면하게 된다.

? 망명 방랑시대 (1849~1864) 이 시기에 그는 스위스 취리히에 근거를 두고 '예술과 혁명'(1849), '미래의 예술작품'(1850), '오페라와 드라마'(1851) 등의 저작으로써 그의 예술사상을 전개시켰고, '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겐의 반지'의 작곡을 진행시킨다. 마틸데 베젠동크와의 연애사건은 이 시기에 해당한다. 그는 또한 빈과 러시아에까지 지휘로 나서기도한다.
? 귀국 정착시대 (1864~1871) 절망에 빠진 바그너는 평소 그를 존경하는 바이에른 왕국의 루드비히 2세로부터 국빈 자격으로 초청받음으로써 영광의 귀국, 정착의 시대가 열리게된다. '마이스터징거'와 '트리스탄'도 공연된다. 리스트의 전처의 딸인 코지마(Cosima)와 재흔하게 되는데 도덕적 불륜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의미를갖게 된다.

? 이상 실현시대 (1871~l873) : 그는 바이로이트에 음악극을 이상적으로 공연할 수 있는 극장을 건립하게 되는데 여기서 4일의 밤이 소요되는 총 16막으로 된 오페라 역사상 최대의거작인 '니벨룽겐의 반지'를 공연한다. 만년의 바그너는 최후의 작품인 '파르지팔'을 작곡했으며 존경과 영광에 쌓인 채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바하와 베토벤의 경우처럼 바그너는 근세 음악사에서 한 시대의 분수령을 이루는 거대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바그너의 음악은 다른 음악가의 경우와는 달리 그의 예술사상의 표현이라는 느낌이 큰데, 실제 그는 음악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문학, 연극, 정치, 종교에 걸쳐 저서를 남겼다. 그 중에서 그의 예술이론을 대표하는 저작 두 개를 소개한다. '미래의 예술작품'(Das kunst und die Revolution, 1849)에 있어서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을 이상적 종합예술로 보고 있다.

그런데 점차로 이러한 예술의 종합성이 깨뜨려지고 개별적인 예술로 분열되었기 때문에 미래의 예술은 다시 종합된 완전한 예술이 되어야 한다는 견해이다. '오페라와 연극'(Oopera und Drama, 1851)에서는 위의 주장이 더욱 철저히 이론화되어 있다. 그는 오페라의 근본적 과오는 표현의 수단이어야 할 음악이 목적처럼 되고, 목적이어야 할 극이 수단처럼 되어 있는데 있다고 본다. 그는 재료로서는 보편적인 정서를 지니는 시노하가 가장 좋으며 미래의 예술은 연극과 음악의 종합이어야 할 것인데 언어적 특징을 무시한 기계적구성이어서는 안되고, 말하는 듯한 서창선율(Sperchgesang)이어야 한다고 본다.

이와 더불어 관현악은 매우 중시되어야 하며 언어로서 나타내지 못하는 것까지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극적 진행을 유기적으로 묶기 위해서 지도동기의 사용을 강조하고 있다. 바그너의 중요성은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베르디가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마찬가지이겠는데 바그너는 독일오페라를 절정에 끌어올렸으며 이른바 낭만적 국민오페라의 이상을 실현했다. 둘째, 극음악이라는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내었는데 이것은 낭만주의 극음악에서 가장 위대한 창조에 속한다. 셋째, 특히 그의 후기 작품에 있어서의 화성적 기법은 조성음악을 상한선에까지 끌어올렸으며 현대음악에의 길을 준비한 셈이 된다.

바그너의 예술적 요소를 분석하면 작곡구성의 원리는 베토벤의 교향곡에서, 자연의 정서표출은 베버의 감각에서, 화려한 무대효과는 마어베어에서 배운 것이 많다. 또한 베를리오즈로부터는 음악효과에 가득한 관현악법을 계승했으며, 리스트로부터는 쇼팽에서 시작된 반음계적 화성법을 적극 이용했다. 이처럼 바그너는 모든 위대한 예술가가 그러했듯이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자기의 것으로 동화시켜 최대의 효과를 이룩하는데 성공했다.

그의 음악의 텍스트는 '탄호이저', '로엔그린'의 경우처럼 중세의 민족문학, '니벨룽겐'의 경우처럼 게르만 실화 등의 새로운 재현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편 그의 고대 그리스 비극에의 존경과 열중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가 그의 음악의 이념적 원형을 그리스 비극에서 발견했음은 그의 저서에서도 강조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를테면 그는 고전적 이념의 실현을 위해서 낭만적 양식의 수법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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