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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ra 공부해보아요

Symphony No. 7 in A Major, Op. 92 · Herbert Blomstedt & Staatskapelle Dresden

Symphony No. 7 in A Major, Op. 92 · Herbert Blomstedt & Staatskapelle Dresden



Beethoven: Symphony No.7 in A major, Op.92
베토벤 교향곡 7번 Op.92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독일

1. Poco sostenuto-Vivace
2. Allegretto
3. Presto
4. Allegro con brio

Beethoven: The Symphonies
℗ Deutsche Schallplatten Berlin GmbH
Released on: 2008-09-19
 

Herbert Blomstedt · Staatskapelle Dresden
     
베토벤 교향곡 7번
Symphony No.7 in A major, Op.92
이 곡은 1811년 말엽에 작곡되기 시작하여 1813년에 완성되었다. 베토벤이 구축해온 ‘장대한 스타일’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후기 작품으로, 춤과 축제를 연상시키는 에너지 넘치고 다이내믹한 리듬이 돋보이는 곡이다. 4악장 구성이며, 다른 교향곡과 다르게 느린 악장이 없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교향곡 7번 가장조 Op.92 "대곡"》 은 1811년에 보헤미아의 휴양지 테플리스에서 작곡하기 시작하여 1812년에 완성하였다. 빈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초연했으며, 모리츠 폰 프리스 백작(Moritz Reichsgraf von Fries 1777~1826)에게 헌정했다. (정식 표제는 대교향곡이다.) 8번과 동시작곡된 7번 교향곡은 경쾌한 장단과 리듬을 앞세운 무곡 스타일 형태를 뛰우고 있는 곡이다.
리드미컬한 박력을 가진 장려한 걸작으로, 특히 제2악장 알레그레토의 아름다움은 유명하다. 리스트(헝가리)는 ‘리듬의 신화(神化)’, 바그너(독일)는 ‘무도의 신화’라고 이 곡을 평했다. 압도적인 리듬의 격류가 전곡을 일관하여 거장의 불굴의 생명력을 상기시키고 있다.
로망 롤랭은 이 곡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는데, 이 말이야말로 이 곡의 진수를 말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리라. ‘A장조 교향곡은 도취자의 작품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거대한 웃음을 수반하는 격정의 흥분과,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해학의 번뜩임, 상상할 수도 없는 황홀함과 열락(悦樂)의 형상. 그것은 완전히 술에 취한 사람의 작품이며, 힘과 천재성에 도취한 사람이 만든 것이었다. 스스로 “나는 맛이 좋은 술을 인류를 위해 바치는 주신(酒神)이다. 사람에게 거룩한 열광을 주는 것은 나이다”라고 일컫던 사람의 작품이다.’ 1813년 12월 8일, 베토벤이 직접 지휘봉을 들고 이 곡을 초연했다. 이 교향곡은 그 수법 · 구성 · 표현 · 내용 · 악기의 편성 등 모든 점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중 제1위의 것이라고들 한다.


1악장(Poco sostenuto-Vivace)
가장조의 목가풍 서주로 시작한다. 3분 남짓 서주가 연주되고 이어 꾀꼬리 소리를 연상케 하는 경쾌한 리듬의 1악장 제시부가 이어진다. 이 주제에 나타나는 특유의 리듬은 이후 1악장 전체에 걸쳐 반복된다. 서주를 제외한 1악장은 전형적인 소나타 형식이다. 장엄한 분위기를 지닌 서주부에 이어 오보에가 노래하는 제1주제가 나타나, 얼마 후 슬픈 소리를 띤 제2주제로 나아간다. 이윽고 「무도교향곡」이라고 일컬어지는 민속 무곡풍의 소주제가 나타나, 그것이 한없이 변화하면서 발전한다.
2악장(Allegretto)
'알레그레토(조금 빠르게)'라고 써 있지만 이 교향곡에서 가장 느린 악장이다. 가단조의 멜랑콜리한 주제가 제시되고, 대위법적으로 전개된다. 관현악의 쓸쓸하고 엄숙하며 침울한 주제에 대해, 한편에서는 희망에 찬, 광명을 띤 주제가 한 줄기의 희미한 빛을 나타내면서 전개한다.
3악장(Presto)
바장조의 스케르초이다. 전형적인 겹세도막 형식(A-B-A)을 확장한 A-B-A-B-A 구조로 되어 있다. 활기와 탄력이 넘치는 리듬으로, 조야한 쾌활함과 삶의 환희를 표현하고 있다.
4악장(Allegro con brio)
이 교향곡을 통틀어 가장 빠르고 힘이 넘치는 악장으로, '바커스(술의 신)의 향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약박에 있는 액센트가 특징. 큰소리로 노래 부르고 춤을 춘다. 환희에 찬 움직임, 발랄한 생명력이 타오른다.

격렬한 환호를 끌어낸 초연무대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은 1800년대 초반부터 수년간 베토벤이 구축해온 ‘장대한 스타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후기 작품 중 하나이다. 이 곡의 초연무대는 이 교향곡이 만들어질 무렵에 일어난 전투였던 하나우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오스트리아와 바바리아의 군인들을 위한 자선음악회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초연은 베토벤의 생애에서도 가장 격렬한 환영을 받은 무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교향곡 7번〉 때문에 이 자선음악회가 그렇게 큰 환호를 끌어낸 것은 아니었다. 〈교향곡 7번〉보다 하나 앞선 출판번호(op.91)를 달고 발표된 〈웰링턴의 승리, 혹은 빅토리아 전쟁〉이 이날 베토벤이 거둔 커다란 성공의 주된 요인이었다. 원래 〈웰링턴의 승리〉는 사람이 아닌, 판하르모니콘이라 불리는 기계가 연주하도록 작곡된 곡이었는데, 이 날 초연무대에서는 오케스트라를 위한 버전으로 편곡되어 연주되었다.

베토벤과 멜첼
사실 〈교향곡 7번〉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웰링턴의 승리〉에는 요한 네포무크 멜첼(Johann Nepomuk Maelzel)이라는 뛰어난 상공업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던 피아니스트가 베토벤의 생애에 등장하게 된다. 1812년 청력을 거의 상실한 베토벤에게 멜첼은 보청기라는 발명품을 선사해준다. 그는 베토벤을 일종의 실험 대상으로 여기고 보청기가 가진 상업적인 가치를 가늠해보려 한다. 또한 그는 메트로놈의 초기 형태의 발명가이기도 했다. 베토벤은 최초로 악보에 메트로놈 표시로 빠르기를 정확하게 기록한 작곡가가 되었다. 앞서 언급된 〈웰링턴의 승리〉는 원래 판하르모니콘이라는 기계장치를 위해 작곡되었는데, 바로 멜첼이 베토벤을 설득하여 자신의 발명품을 위한 작품을 쓰도록 부탁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베토벤을 설득하여 이 곡을 진짜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으로 편곡하도록 부탁하기도 한다.


여러 교향곡을 동시에 작업한 베토벤
베토벤의 교향곡 중에서도 가장 칭송을 받아오고 있는 〈교향곡 7번〉의 창작 배경과 관련해서는 그다지 매우 정확한 정보들이 남아있지 않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베토벤이 이 곡을 작곡했던 1812년, 그의 청각은 거의 상실된 정도에 이르렀고, 그의 창작노트에는 그가 〈교향곡 7번〉과 〈교향곡 8번〉을 동시에 작업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 정도이다. 하지만 이 창작노트의 기록에 따르면 베토벤은 이 두 곡의 작곡을 동시에 진행하면서도 중간에 잠시 휴식기를 두고 그 기간 동안 〈교향곡 9번〉과 세상에 나오지 못한 채 미스터리로 남은 〈교향곡 10번〉을 이미 시작하고 있었다.

쉰들러가 전해주는 당시 청중들의 환호
오늘날 베토벤의 제자이자 그의 전기로 널리 알려진 안톤 쉰들러(Anton Schindler)가 남긴 기록들은 큰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교향곡 7번〉과 관련해서 그가 남긴 기록들은 이 곡이 초연무대에서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두었는지를 가늠케 하고 있다. 이 곡의 초연무대에서 〈교향곡 7번〉의 2악장은 이례적으로 앙코르 요청을 받았고, 이로 인해 2악장은 두 번 연주될 정도로 청중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또한 쉰들러의 기록은 당시 빈의 신문에 “〈교향곡 7번〉이 황홀경에 이를 정도로 큰 박수갈채를 이끌어냈다”는 기사 가 실리며 신빙성을 얻게 된다.

춤과 축제를 연상시키는 움직임
〈교향곡 7번〉의 초연 무대 이후, 이 곡은 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여러 사람들에 의해 회자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춤’과 ‘축제’의 분위기는 이 곡을 묘사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가 되었다. 작곡가 베를리오즈에게 1악장은 ‘농부들의 춤’이었고, 슈만에게 2악장 알레그레토는 ‘시골풍의 결혼식’으로 묘사되었다. 바그너는 이 곡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통해 〈교향곡 7번〉 전체가 ‘춤의 화신’이라고 표현했다. 그런가 하면 20세기에 들어와서 〈교향곡 7번〉의 2악장은 이 곡이 춤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용가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역사상 이 곡에서 누가 무엇을 들었던가와 상관없이 그만큼 〈교향곡 7번〉은 다이내믹한 힘과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리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 곡을 구성하는 네 개의 악장 중에서 단 한 악장도 느린악장이 없다는 것도 이 곡의 큰 특징 중 하나이다.

장대한 4개의 악장
매우 긴 서주부로 시작하는 1악장은 A장조, C장조, F장조가 커다란 세 개의 조성적인 축을 구성하면서 진행된다. 원조인 A장조 이외의 (원조와 3도 간격으로 떨어져 있는) 두 조성은 이 곡의 조성적인 팔레트를 보다 대담무쌍하게 만든다. 이로 인해 1악장에서의 베토벤의 목표는 조성 간의 이동, 즉 이조가 아니라 조성 간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조성영역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화성적인 영역들을 실험하는 것이다. 당시 청중들에게 엄청난 호평을 받은 2악장은 무엇인지 모를 불안함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약간의 그로테스크함이 서려 있는 장송행진곡처럼 낮은 음역에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움직인다. 이어지는 스케르초 악장에서 스케르초의 트리오 부분은 어쩌면 성지 순례자들의 노래를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마지막 악장은 전체 곡이 가진 리듬적인 추진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
ⓒ 음악세계 & 음악사연구회(사)


Horace Vernet's painting "Battle of Hanau"
〈7번 교향곡〉의 초연은 이 하나우 전투에 참전한 군인들을 위해 열린 자선음악회에서 이루어졌다.

베토벤, 교향곡 제 7번
[ Beethoven Symphony No.7 in A major op.92 ]
일찍이 베토벤은 “나는 인류를 위해 좋은 술을 빚는 바커스이며 그렇게 빚은 술로 사람들을 취하게 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그의 [교향곡 제7번]이야말로 이 말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일 것이다. 특히 리듬의 역동성은 이 작품의 핵심적인 매력으로 리스트는 이 교향곡을 가리켜 “리듬의 신격화”라 표현하기도 했다. 강박적인 리듬의 반복을 통해 드라마틱한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이 교향곡을 듣고 있노라면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원초적인 리듬충동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베토벤 [교향곡 제 7번]은 춤을 추듯 리듬의 약동과 힘이 느껴지는 드라마틱한 작품이다.
베토벤 음악 인생에 길이 기억될 초연 연주회
베토벤이 [교향곡 제7번]을 완성한 1812년은 그의 작품 활동이 주춤하기 시작한 시기다. 1802년부터 1809년까지 7년간 베토벤은 다섯 곡의 교향곡과 현악4중주곡 ‘라주모프스키’, 피아노 소나타 ‘발트슈타인’과 ‘열정’ 등의 걸작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고, 1809년에도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와 현악4중주 작품74, 피아노 소나타 ‘고별’ 등 걸작들을 계속 발표하며 지칠 줄 모르는 창작의욕을 과시했으나 1810년부터 차츰 작곡의 속도를 늦춰갔다. 그러던 중 1812년 4월 13일에 드디어 4년간의 교향곡 공백기를 깨고 몇 곡의 음악을 다 합쳐놓은 것만큼의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담은 [교향곡 제7번]을 완성해내면서 교향곡 작곡가로서 건재함을 과시했다.
1813년 12월 8일, 빈 대학 강당에서 이루어진 [교향곡 제7]번의 초연무대는 베토벤의 경력에 있어 길이 기억될 만한 연주회였다. 연주 당시 부악장을 맡았던 작곡가 슈포어가 남긴 위의 증언을 보면 [교향곡 제7번]을 지휘할 당시 베토벤은 이미 청력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날 공연은 베토벤의 공연들 가운데도 기억에 남을 만한 매우 성공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연주 당일 베토벤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관객들이 환호한 작품은 [교향곡 제7번]이 아니라 그날 공연에서 함께 연주된 [웰링턴의 승리]였기 때문이다.
흔히 ‘전쟁 교향곡’이라 불리기도 하는 [웰링턴의 승리]는 메트로놈의 발명가 멜첼이 고안한 ‘판하르모니콘’이란 악기를 위해 작곡된 곡으로, ‘전쟁’과 ‘승리’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팡파르, 군대의 호출, 대포소리, 전쟁장면 등이 단순하게 묘사되고 마지막 종결부의 압도적인 클라이맥스로 인해 대중들은 이 작품에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웰링턴의 승리]보다 [교향곡 제7번]이 훨씬 더 뛰어난 작품이라 생각했던 베토벤은 청중의 이런 반응에 실망했고, 빈 신문에서 [교향곡 제7번]을 가리켜 [웰링턴의 승리]의 “들러리 작품”이라 칭한 것에 몹시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당대 청중이 [교향곡 제7번]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특히 장송행진곡 풍의 2악장에 열광해, 베토벤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는 2악장을 다시 한 번 연주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디오니소스적 충동, 술의 향연을 떠올리게 할 만큼 리듬의 역동성과 광란의 느낌이 가장 잘 표현된 곡이다.
그림은 디오니소스 축제를 그린 17세기 화가 니콜라 푸생의 작품.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향연, 광란의 춤곡
[교향곡 제7번] 1악장은 매우 길고 복잡한 서주로 시작된다. 1악장의 서주는 그때까지의 교향곡에서는 거의 들어볼 수 없었던 가장 거대한 서주로, 신비로운 화음과 계속되는 음계, 목관악기에 의해 반복되는 단순한 모티브가 이어지면서 긴장감을 더한다. 플루트와 오보에가 독특한 부점 리듬형이 반복하는 사이 어느새 템포는 매우 빠른 비바체로 바뀌고 마치 춤곡과도 같은 리듬형이 강박적으로 나타나면서 본격적으로 빠르고 경쾌한 음악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대개 4/4박자로 되어있는 일반적인 교향곡의 1악장과는 달리 [교향곡 제7번]의 1악장은 바로크 춤곡 ‘지그’(Gigue)를 연상시키는 6/8박자로 되어 있어 특별하며, 여기에 팀파니까지 리듬의 향연에 가세해 집요하게 같은 리듬을 반복하면서 광포함을 더한다. 그야말로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향연이라 할 만한 광란의 춤곡이다.
알레그레토(Allegretto, 조금 빠르게)라는 애매한 템포로 설정된 2악장은 장송곡 풍의 독특한 음악으로 초연 당시 청중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청중에게도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음악이다. 2악장이 시작되면 목관악기의 불안정한 화음에 이어 저음 현악기들이 장례행진을 연상시키는 리듬 주제를 연주한다. 저음현의 어두운 음색이 침통한 분위기를 더하는 가운데 어느새 제2바이올린 파트가 끼어들어 주제를 연주하고, 저음현은 또 다른 선율을 연주하면서 제2바이올린과 조화를 이룬다. 새로운 악기들이 끼어들 때마다 감정의 깊이는 더욱 강해지며 청중을 음악 속으로 끌어들인다. 2악장 중간 부분에서 클라리넷의 따스하고 부드러운 선율이 잠시의 위안을 전해주기도 하지만 저음 현악기들은 계속해서 장송음악의 리듬을 집요하게 반복하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3악장은 베토벤 음악의 역동적 에너지가 최고조에 달한 스케르초라 할 수 있다. 그 무시무시한 속도만으로 흥분을 일으키며 그 과격한 리듬은 21세기 청중에게도 여전히 놀라움을 안겨준다. 때때로 강한 악센트와 제2호른의 갑작스런 돌출 등 예상치 못한 반전에서 베토벤 특유의 블랙유머도 느낄 수 있다. 반면 3악장의 중간에 등장하는 트리오 부분에선 현악기가 지속음을 연주하는 사이 목관악기들은 한층 이완된 리듬을 선보이며 역동적인 스케르초 부분과 대비된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고요한 트리오 부분에선 출렁이는 목관악기의 움직임이 더욱 의미있게 다가온다.
4악장은 처음부터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와 강렬한 리듬으로 충격을 준다. 마치 완벽한 기계장치가 돌아가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오케스트라의 합주에서는 어느 정도 규칙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악장에선 특히 약박을 강조하는 규칙적인 악센트와 반음 모티브로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만들어내는 저음현의 독특한 움직임에 주목해보자. 다른 음악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감흥을 느끼게 될 것이다. 거칠고 사나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4악장은 베토벤의 가장 자극적인 교향곡을 마무리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압도적인 결론이다.


추천음반
옛 거장들의 역사적인 명연을 비롯해 수많은 명반이 존재하며 4개만을 꼽기엔 어려움이 많은 작품이다. 베토벤 [교향곡 제7번]의 역동적인 리듬감을 느끼고 싶다면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반(DG)을 추천하고 싶다. 2악장의 진지함을 느끼고 싶다면 클라우스 텐슈테트가 지휘하는 런던 필하모닉의 음반(BBC)도 추천할 만하며, 그밖에 귄터 반트가 지휘하는 북독일 방송교향악단의 음반(RCA)과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가 지휘하는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의 음반(Teldec)도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연주 정보
독일 후기 낭만파의 거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지휘한 베를린 슈타츠카펠레(Staatskapelle Berlin)의 1926년 녹음과 20세기 최고의 베토벤 해석자로 정평이 났던 독일의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43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가진 녹음은 사료적인 가치가 높은 명연이다. 또, 푸르트뱅글러가 2차 대전 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가진 1954년 녹음도 불멸의 명연 반열에 올라있다.
그리고 푸르트벵글러와 더불어 20세기 전반기 지휘계를 양분했던 이탈리아의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두 종,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1936년 녹음과 자신의 수족과도 같은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1951년 녹음도 그에 못지 않은 명연이다. 한편 ‘지휘대의 불사조’로 불릴 만큼 극적인 삶을 살았던 독일의 지휘자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가 이끄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1955년 녹음과 20세기 가장 성공한 지휘자인 오스트리아 출신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두 종, 빈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1959년 녹음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1977년 녹음도 빼놓을수 없다.
거장 에리히 클라이버(Erich Kleiber)의 아들인 독일 태생의 오스트리아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1974년 녹음은 스테레오 시대에 가장 주목을 받으며 화제가 되었던 명연이다. 오늘날 이 곡의 결정반이자 가장 이상적인 명연으로 꼽힌다.
그외 독일의 지휘자 귄터 반트가 지휘하는 북독일 방송 심포니 오케스트라(NDR Symphony Orchestra)의 1989년 녹음, 오스트리아의 지휘자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Nikolaus Harnoncourt)가 지휘하는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Chamber Orchestra of Europe)의 1990년 녹음, 영국의 지휘자 존 엘리엇 가디너(John Eliot Gardiner)가 지휘하는 혁명과 낭만의 오케스트라(Orchestre Revolutionnaire et Romantique)의 1993년 녹음,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2000년 녹음이 유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토벤, 교향곡 제7번



작품 구성 및 해설
베토벤의 아홉 개의 교향곡 중 가장 리드미컬한 작품으로 꼽힌다. 원숙기 베토벤의 독창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걸작이기도 하다. 다이나믹한 리듬을 전면에 내세운 파격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후세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 곡에 대해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는 ‘리듬의 화신’이라고 했고, 리차드 바그너(Richard Wagner)는 ‘무도의 성화(聖化)’라고 찬사를 보냈다.
베토벤의 7번째 교향곡. '투쟁과 패배' 라는 도식의 5번이나 '자연에 대한 찬미' 가 중심 주제인 6번과 달리, 7번에서는 경괘한 장단과 리듬을 앞에 내세우는 무곡 스타일의 아이디어를 보여주고 있다. 당대건 후대던 이 곡을 평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춤이나 춤곡, 축제 등의 흥분되고 들뜬 모습을 연상케 한다고 한 바 있다. 후속작인 8번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작업했는데, 대략 1811년 말에 착수해서 1812년 4월(혹은 5월)에 완성했다고 되어 있다. 이 시기 동안 베토벤은 빈이 아닌 보헤미아 지방의 테플리츠(현 체코 테플리체)에서 요양하고 있었는데, 불멸의 연인도 여기서 마지막으로 던져졌기 때문에 이 곡들과 모종의 연관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연구가들도 있다. 헌정은 베토벤의 후원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은행가 모리츠 폰 프리스 백작에게 행해졌다.

편성: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파곳 2, 호른 2, 트럼펫 2, 팀파니, 현악 5부.
작곡 : 1806~13년
초연 : 비공개 초연은 1813년 4월20일에 루돌프 대공의 사택에서 이루어짐. 공개 초연은 1813년 12월 8일 비엔나 대학 강당에서 열린 전쟁 부상병을 위한 자선 연주회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이루어짐
출판 : 1816년 / 헌정 : 프리스 백작 / 연주시간 : 약 40분

작품 개설
이 곡의 단편적인 스케치는 1806년경의 노트에서 발견된다. 바로 현악4중주곡 {라주모프스키}나 {교향곡 4번}과 같은 시기이다. 그러나 베토벤이 그 주제의 단편을 과연 교향곡에 사용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본격적으로 작곡하기 시작한 것은 1811년 가을부터이며 이듬해 5월13일 완성되었다. 앞의 {교향곡 6번} 이후 3년 이상 교향곡으로부터 멀어진 셈이 된다.
이 3년 사이에 베토벤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먼저 가장 커다란 타격은 전쟁에 의한 난리였다. 1809년 4월 9일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전쟁 상태에 들어가며 5월12일 나폴레옹 군대가 비엔나를 침입한다. 이 때문에 베토벤의 후원자들은 비엔나에서 도피하며, 베토벤은 재정적인 후원도 받지 못한 채 정신적으로도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창작도 생각만큼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앓고 있던 귀를 포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하실에서 귀에 베개를 대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1809년 10월 전쟁이 끝나고, 11월에 프랑스군은 퇴각한다. 이 기간 동안 베토벤은 여러가지 좋지 않은 일을 겪게 된다. 게다가 건강 상태도 좋지 않았다. 귀족들이 비엔나로 돌아온 것은 이듬해 1월이었다. 얼마 후 이 시기의 심경을 반영한 피아노 소나타 {고별}이 작곡되었다.
이 피아노 소나타 작곡을 계기로, 아울러 전쟁이 끝나면서 베토벤의 창작력은 서서히 회복되었다. 공백 기간을 메워 나갔다. 그리고 기분도 차분해지고 건강 상태도 얼마간 좋아지며, 다시 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반면에 1809년 무렵부터 베토벤은 테레제 말파티라는 대지주의 딸과 알게 된다. {고별} 직전에 쓰여진 작품 78의 소나타를 헌정한 브룬스비크 백작의 딸 테레제와는 다른 이 테레제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품게 되었다. 베토벤으로서는 테레제와의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현악 4중주곡 내림 마 장조 작품 74 {하프}에 나타나는 밝은 악상은 테레제라는 여인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
1810년 4월에 테레제를 위해 썼다는 소품 {엘리제를 위하여}가 작곡되며, 5월에 테레제를 위한 작품 83의 두 가곡, 즉 첫 곡 {슬픔과 기쁨}과 둘째곡 {그리움}이 작곡된다. 그 외에 군악대용 음악을 쓴 것을 보면 베토벤은 한편으로는 사회정서를 반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테레제에 대한 기분을 어떻게든 음악으로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6월의 {에그몬트}를 위한 음악은 이런 두 가지 측면을 연결하는 음악으로 볼 수 있다. 여름의 현악 4중주곡 작품 95 {세리오소}는 18살의 여인과 40살 가까운 남자의 결혼이 실현 불가능해지고 그에 따라 극히 내면적이며 심각한 성격으로 변하게 된다. 이 사랑도 결국 파국으로 끝나고 만다.
1811년에는 나폴레옹은 절정을 과시하고 있었으나 베토벤은 테레제 폰 브룬스비크로부터 그녀의 상반신 초상화를 선물받고 실연의 아픈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베토벤은 그것을 보물처럼 여겨 방에 걸어놓고 평생 소중하게 여겼다. 이 해에는 건강도 좋지 않아 테레제와 그의 남동생이자 베토벤과도 친했던 프란츠와 함께 이탈리아 여행을 갈 예정이었다.
1811년 여름, 베토벤은 휴양을 위해 경치가 좋은 온천지 테플리츠에 간다. 그 곳에서 아말리에 제바르트라는 가수와 재회하여 친절한 대접을 받게 된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곳이 마음에 들어 이듬해에도 다시 방문하여 제바르트의 신세를 지게 된다.
실연 후 조금은 투쟁적으로 변모해 있던 베토벤의 기분은 테플리츠에서의 생활로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런 즐겁고 밝은 기분이 작품에 반영되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이전의 스케치를 다시 끄집어내 작곡을 시작한다. {교향곡 7번}도 예외는 아니었다. 실제로 1811~12년에는 거의 밝은 장조 곡만 쓰여지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나온 곡은 또한 당연히 낭만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교향곡 7번}도 예외는 아니었다. 실제로 1811~12년에는 거의 밝은 장조 곡만 쓰여지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나온 곡은 또한 당연히 낭만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교향곡 7번}은 디오니소스적인 즐거움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리듬도 명쾌하며, 이 리듬은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그 때문에 바그너는 이 곡을 {춤의 성화(聖化)}라고 불렀다.
동시에 이 곡에는 강한 의지나 음악에 의한 주장의 관철이라는 요소도 존재한다. 이것은 3번, 5번 교향곡의 특징과 함께 이 무렵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귓병 때문에 생긴 절망감을 떨치고 {교향곡 3번}을 쓰고, 바깥세상으로부터 느낀 실망감에서 {교향곡 5번}을 썼던 것과 비슷하다. 즉 전쟁과 실연으로부터의 정신적인 극복과 큰 관계가 있다. 이런 역할을 한 것이 주제의 수평적인 진행인데, 1악장의 1주제, 2악장의 주요 주제들, 혹은 4악장의 1주제 등에 이것이 사용되고 있으며, 리듬 효과도 지극히 추진적인 느낌을 지닌다. 그리고 이런 진행이 전곡을 통일시키는 요소가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또한 공개 초연 때에는 {전쟁 교향곡(art : 웰링턴의 승리, 작품 91)}도 함께 연주되었다. 애국적인 분위기도 고양되어 있을 때였기에 이 두 곡은 대성공을 거두며 {교향곡 7번}은 2악장이 앙코르로 연주되었다.
작품개요 및 배경
이 곡은 1811년 가을부터 작곡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 5월 완성되었다. 그 전 교향곡인 6번(1808년 완성) 작곡 이후 3년 이상 교향곡 작곡에서 멀어져 있던 셈이 되는데, 이 기간 동안 베토벤은 여러 가지 어려움과 변화를 겪게 된다. 먼저 1809년 5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전쟁으로 나폴레옹 군대가 빈을 침입하였는데, 이 때문에 베토벤의 후원자들이 빈을 피해 도망을 가 베토벤은 재정적 후원을 받지 못했으며, 정신적으로도 안정을 갖지 못했고 따라서 창작이 생각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이해 11월 나폴레옹 군대가 물러가 다시금 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되고 건강도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한편, 1809년 무렵 베토벤은 테레제 말파티라는 대지주의 딸을 알게 된다. 1810년 베토벤은 테레제를 위해 유명한 <엘리제를 위하여>를 작곡 하였는데, 이 둘의 관계는 20살이 넘는 나이차이 등으로 결국 파국으로 끝난다. 1811년에 접어들어 베토벤은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휴양을 위해 온천이 있는 테프리츠로 간다. 이 곳에서 안정을 되찾은 베토벤은 다음해 다시 이곳을 방문하게 되는데, 실연 후 조금은 투쟁적으로 변모해 있던 베토벤은 테프리츠에서의 생활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고 이런 즐겁고 밝은 기분이 교향곡 7번 작곡에 반영되었다. 사실 1811-1812년의 작품은 이런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거의 밝은 작품이 대부분이다.

작품 배경
1800년, 야심차게 교향곡 1번을 완성했던 베토벤은 이후 교향곡 4번까지는 2년에 한 편 꼴로 교향곡을 작곡해 발표했다. 그러다가 1808년에는 두 편의 교향곡, 5번‘운명’과 6번 ‘전원’을 초연했는데, 이후 4년 가까이 공백기를 갖게 된다. 이는 당시 정치 사회적인 상황과 여러모로 고통스러웠던 개인 사정 때문이었다. 우선 1809년 4월 9일 시작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간의 전쟁이 베토벤의 창작 활동에 큰 장애가 되었다. 무엇보다 판세가 급격히 프랑스 쪽으로 기울면서 위기감은 고조되었는데, 5월 9일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빈으로 진격해오자 베토벤의 후원자들은 대부분 해외로 도피해버렸다. 따라서 경제적 지원도 끊겼고, 베토벤은 열악한 상황에서 죽음의 공포와 싸우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야 했다. 게다가 청각 장애도 상태가 계속 악화되어 그를 더욱 위축시키게 된다.
하지만 베토벤은 이런 와중에도 23살 연하인 17살 여성 테레제 말파티(Therese Malfatti)과 만나 연정을 품게 되었고, 그녀와이 미래를 꿈꾸었으나 테레제 집안의 반대로 결국 1810년 여름 헤어지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베토벤은 작곡하는 것을 중단하지는 않았으나 교향곡과 같은 대곡을 만들 엄두는 내지 못했다. 다행히 1809년 10월 14일 쉔브룬(Schoenbrunn)에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간에 강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이 끝이 났고, 빈을 떠났던 귀족들도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1811년부터는 귀족들이 약속한 종신 연금을 지급받기 시작했다.
안정을 되찾은 베토벤은 새로운 교향곡 작곡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었다. 이윽고 1811년 후반 요양을 위해 보헤미아(Bohemia) 지방의 테플리츠(Teplitz : 현 체코 세베로체스키 주에 있는 테플리체)을 찾은 베토벤은 여기서 교향곡 7번과 8번을 구상했고, 작곡에 착수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본격적으로 교향곡 7번 작곡에 전념해 4월 혹은 5월 경 전곡을 완성했다.
다만 2악장 알레그레토의 경우 이미 1806년에 작성한 스케치가 발견되었다. 이는 베토벤이 이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다른 곡에 쓰려고 만들어두었던 멜로디를 활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초연은 1813년 4월 20일, 빈의 루돌프 대공의 저택에서 비공개로 이루어졌으며, 공식적인 초연은 1813년 12월 8일, 빈 대학 강당에서 열린 ‘하나우 전쟁 상이용사들을 위한 자선 음악회’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날 공연에서는 일명 ‘전쟁교향곡 Battle Symphony’으로 불리는 관현악곡 [웰링턴의 승리Wellington`s Victory ]와 함께 초연되었다.
당시 베토벤은 청각에 심각한 장애가 있었음에도 지휘를 맡아 혼신의 힘을 다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공연의 성격상 청중들은 [웰링턴의 승리 Wellington`s Victory]에 더 뜨거운 반응을 보였지만 이 곡도 기대 이상의 반응을 모았다. 초연의 기록적인 성공으로 인해 12월 12일 앵콜 공연을 가졌고, 1814년 1월과 2월에도 같은 레퍼토리로 공연을 가졌다. 그리고, 그때마다 반응은 뜨거웠던 것으로 기록이 전해진다.
자극적이고 광란에 넘치며 흥분시키는 베토벤 교향곡 7번..
베토벤의 9개 교향곡 중 별명이 붙어있는 3번 "영웅", 5번 "운명", 6번 "전원", 9번 "합창"이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다 하겠지만 교향곡 7번은 베토벤 교향곡을 하나만 꼽으라는 설문조사에서 높은 득표를 보일 만큼 클래식 음악을 본격적으로 듣는 이들에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명곡이다.
베토벤은 일찌기 "나는 인류를 위해 좋은 술을 빚는 바커스(술의 신)이며 그렇게 빚어진 술로 사람들을 취하게 해준다"라고 했다 하는데 그의 수많은 걸작 중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 그의 7번 교향곡이다. 정말로 곡을 듣고 있노라면 예외 없이 사람을 흥분 시키고 또한 술에 취했을 때마냥 용기에 넘치는 힘을 느끼게 해주는 불가사의한 곡이다. 이 곡의 1, 4악장을 가리켜 베토벤이 술에 취해서 작곡된 것이 아닌가 하고 훗날 슈만의 아내 클라라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비크가 비꼬았다고 하는 데 이는 '술은 나쁜 것이다'라는 말이 틀리듯이 어리석은 비평이 아닐 수 없다. 이 말을 돌리면 건강한 취기를 용납할 수 없는 앞뒤로 꽉 막힌 분이라면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을 좋아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는 예측은 가능하다.
리스트가 이 곡을 가리켜 "리듬의 화신"이라 했고, 교향곡 7번에 대해 바그너는 [춤의 성화(聖化)]라고 하면서 밝고 명쾌한 이 작품을 높게 평가하였다. 동시에 이 곡에는 강한 의지나 음악의 주장에 대한 관철이라는 요소도 존재한다. 교향곡 3번이 귓병에 대한 절망을 떨치고, 5번이 바깥 세상으로부터 느낀 실망감에서 작곡하였다면, 7번은 전쟁과 실연을 극복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작곡과 초연
베토벤 교향곡 제7번
1813년 12월 8일에 빈에서 열린 자선 음악회에서 처음 연주되었는데, 하나우 전투에서 부상당한 오스트리아 병사들을 지원하기 위해 개최된 공연이었다. 베토벤 자신도 그렇고 공연을 기획한 사람들도 그렇고 꽤 공을 많이 들였는데, 이 때 관현악단에서 연주한 이들 중에는 후기 현악 4중주 보급에 크게 이바지한 바이올리니스트 이그나츠 슈판치히 등의 명연주가들 외에 당대 혹은 이후의 유명 작곡가들까지 있어서 꽤 흥미롭다. 하지만 청각장애가 한층 심해진 데다가, 당대 악기로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힘과 스피드를 얻기 힘들자 리허설 때 꽤 짜증을 낸 모양이었다. 바이올린 연주자로 참여했던 루이 슈포어의 증언에 따르면, '약하게 연주해야 하는 부분에서는 아예 보면대 밑으로 기어들어갔고, 강한 부분에서는 펄쩍 뛰어올라 고함을 치기까지 했다' 고 한다. 베토벤이 지휘대에서 지휘한 음악회는 한층 고양된 애국주의 열풍과 승리감도 있어서였는지 크게 성공했다. 특히 2악장은 유별나게 인기를 얻어서 여러 형태로 편곡되었고, 초연 무대에서도 앵콜로 연주되었다. 하지만 이 7번이 유독 인기를 많이 얻어 후속작인 8번을 압도하게 되자, 베토벤은 오히려 짜증을 내며 '8번이 7번보다 더 훌륭한 작품' 이라고 출판사에 편지까지 보내 항의했다.

리스트는 이 작품을 "리듬의 화신"이라 했고, 바그너는 "무용의 성화"라고 했다. 그 어떤 작품보다도 리듬에 상당한 비중을 둔 작품이며, 디오니시스적인 활력과 열정이 넘치는 작품이기도 하다.
베토벤의 스케치 북에 의하면 제 7번 교향곡은 늦어도 1811년에 착수된 듯하다.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812년에 들어와서 부터라고 전해진다. 제 2악장의 스케치는 이보다 앞선 1806년 현악사중주 작품 59-3의 작곡 중에 발견된다는데 아마도 처음엔 이 현악사중주에 쓸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이 곡의 완성은 1812년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현재 베를린의 므로시아 국립 도서관에 있는 자필 악보의 표지에 <7 Symphonie 1812 ... 13 ten>이라고 적혀있는데 몇 월인지는 파손 때문에 알 수 없지만 5월 13일인 것으로 추리된다. 베토벤은 1813년 2월에 공개 연주회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비공개의 초연은 1813년 4월 20일, 빈의 루돌프 대공의 저택에서 8번 교향곡과 함께 이루어졌다. 그리고 1813년 12월 8일 빈 대학 강당에서 메트로놈을 발명한 멜첼이 주최한 <하나우 전쟁 상이 용사들을 위한 자선 음악회>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공개초연되었다. 이날 음악회에서는 소위 "전쟁 교향곡"이라 불리우는 <빅토리아 회전과 웰링턴의 승리> op. 91과 교향곡 8번 op. 93도 같이 초연 되었다. 연주회의 성격상 애국적인 기세가 높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초연은 대성공이었다. 교향곡 7번보다 <전쟁 교향곡>이 더 큰 인기를 받긴 했지만 7번도 대호평이었으며 선율이 아름다운 제 2악장은 앙콜을 받기까지 했다. <전쟁 교향곡>과 교향곡 7이 너무 인기가 높아서 결국 4일 뒤인 12월 12일에 재연되고 이듬해 1월과 2월에도 계속 연주회가 열렸으며 그 때마다 제 2악장은 앙콜되었다고 한다. 초연부터 대호평을 받았다는 것은 이 곡의 대중성을 그대로 들어 내보이는 것으로 한번만 들어도 귀에 곧 익숙해지는 악상 (2악장)과 함께 베토벤 특유의 넘치는 위트 (3악장)와 무엇보다도 광란에 넘치는 1악장과 4악장의 매력이 대중들에게 쉽게 어필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작품 구성 및 해설
편성: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파곳 2, 호른 2, 트럼펫 2, 팀파니, 현악 5부.

제 1악장 Poco sostenuto - Vivace
1악장 포코 소스테누토 - 비바체 (Poco Sostenuto - Vivace)는 서주가 있는 소나타형식이다. 악장 전체를 동일한 리듬이 지배하는 것은 전례없는 경우인데, 그런 이유로 리스트는 이 곡을 ‘리듬의 신격화’라고 찬양했다. 또, 보통의 교향곡 1악장이 4/4박자인데 반해 이 악장은 4/4박자로 시작해 주부는 흡사 바로크 시대의 무곡인 지그(Gigue)를 연상시키는 6/8박자로 되어 있는 것도 독특하다. 62마디의 장대한 서주는 파격적인데, 향후 나타날 더욱 파격적이고 강렬한 음악에 대한 예고편같은 느낌을 준다. 이어 플룻과 오보에에 의해 1악장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리듬이 제시되고 플루트가 제1주제를 노래하면서 열기는 더욱 고조된다. 이후 플루트와 제1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제 2주제도 경쾌하다. 앞에 나온 리듬을 계속 반복하면서 발전해나가면서 엄청난 힘을 뿜어내며 역동적으로 전개되다가 화려하게 끝을 맺는다.


소나타 형식. 포코 소스테누토의 서주는 주요부의 주제로 발전시키는 것으로, 본질적으로 주요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한 충실하고 당당하게 곡의 성격을 확실히 보여준다. 이어지는 주요부는 물론 소나타 형식이다. 기본 리듬에 이어 분명한 리듬의 1주제가 나온 후, 경쾌한 2주제가 나타난다. 발전부는 매우 대위법적이다. 재현부에 이어지는 코다는 바소 오스티나토를 동반하며 마찬가지로 전개풍이다.
전곡 중 가장 훌륭한 악장은 1악장이다. 현대악기를 쓴 음반으로는 단연 최고의 연주라 하겠다. 도입부의 첫 f들은 베를린 필 특유의 고급스런 울림의 팀파니를 바탕으로 트럼펫이 또렷히 들린다. 뒤이은 호른의 부드러운 울림도 잘 살아나서 시작부터 최고의 품질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첫 ff에선 트럼펫의 강인하게 길게 내지르는 소리가 전체 관현악을 압도한다. 이런 흥분된 트럼펫을 이렇게 일찍 만날 수 있는 것도 이 녹음의 묘미다. 이와 함께 분주히 움직이는 화려한 현, 또렷한 플룻, 알맞은 크기의 단단한 팀파니는 곡의 분위기를 일찌감치 한껏 흥분된 것으로 만든다. 뒤이은 34번째마디 이후의 sf들은 악보대로 트럼펫이 뚜렷이 감지되는데 그 화려한 음색과 절묘한 음량은 다른 음반들과 확실한 비교우위에 있다. 이후 제시부까지 템포를 조금 서두르는 감이 있는 게 유일한 단점인데 이를 제외하면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다.
제시부의 89번째 마디 역시 호른과 트럼펫이 좌우로 분리되서 힘차게 나아가고 있으며 뒤이은 작은 리듬들도 트럼펫이 놓치지 않고 절묘한 밸런스로 살려낸다. 제 2주제의 겹8분음표의 리듬은 현과 호른으로 처리되는 것이 옥의 티라고 하겠는데 뒤이은 종결부의 극히 화려한 투티는 모든 불만을 잊게 한다.
전개부가 되면 베를린 필의 장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호른과 트럼펫이 ff로 주고 받는 부분은 두 악기가 대등하게 처리되어 있고 뒤이은 팀파니의 울림은 단단하면서도 밝은 회색빛으로 다른 오케스트라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베를린 필만의 고급스러움을 한껏 품고 있다. 호른의 무시무시한 크리센도 후에 맞게 되는 전개부의 클라이막스는 비교 음반들 중 가장 화려한 것으로 특히 트럼펫의 자신만만한 내지름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제 2악장 Allegretto
2악장 알레그레토(Allegretto)는 3부 형식으로 ABA에 이어 AB를 반복하는 악장이다. 베토벤 자신의 교향곡 3번 ‘영웅’의 2악장과 유사한 장송곡 풍의 장엄한 악장인데, 강렬한 주선율은 초연 당시부터 청중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목관악기군이 2마디를 화음으로 울리면 이어 첼로, 비올라, 콘트라베이스 등 현악기들이 장례 행진을 연상시키는 주제를 제시한다. 곡이 진행되면서 분위기가 고조되는데, 클라리넷과 바순이 연주하는 온화한 선율도 잠시 흐른다. 하지만 비장한 장송곡의 리듬이 계속 반복되며 감정을 격앙시키다가 뭉클한 여운을 남기며 마무리 된다.

자유로운 3부 형식. 리드미컬하지만 그 안에 끊임없는 서정성이 흐르고 있다. 1부의 대위선율을 수반한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은 듣는 이의 가슴을 파고 든다. 2부(가 장조 2/4)는 밝아지며, 행복감을 안겨준다. 3부는 1부를 변주시키는 듯하며 푸가토도 두고 있다. 이 악장은 구성의 윤곽면에서 {교향곡 3번}의 "장송 행진곡"과 비슷하다.
2악장 처음의 목관과 호른에 의해 f후 급격히 p로 잦아드는 부분은 f에서의 울림이 이상하리만큼 약하다는 것은 큰 단점으로 생각된다. 뒤이은 비올라와 첼로, 베이스가 처음 등장하는 곳의 어색함은 여전히 이 음반에서도 남아있다. 현의 스타카토가 뚜렷하지 않아서 흔히 2악장에서 기대하는 분위기가 잘 살아나지 못하고 부자연스럽게 들린다. 곧이은 주제선율을 바이올린이 노래하면서부터는 베를린 필의 바이올린을 음색이 눈부실 정도로 화려해서 조금씩 크리센도 되어 ff가 될 때까지 청자를 잡아 끄는 집중력이 대단하다. 뒤이은 ff에서는 호른의 장쾌한 울림과 함께 팀파니와 트럼펫의 반주가 호른사이사이로 또렷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은 흔히 만나보기 힘든 장점이다. 제 2주제부의 호른의 소리도 극히 고급스러운 것이다. 이런 류의 울림은 북 독일 오케스트라들의 공통된 호른소리로 장대하고 강인한 맛이 빈의 오케스트라보다 더 강하다. 제 2주제를 마무리 짓는 ff도 화려한 저현과 또렷한 금관으로 깔끔하게 처리되어서 이부분 역시 매우 훌륭하다. 제 1주제의 재현부는 특히 현에 의한 푸가토 부분을 듣는 재미가 좋다. 베를린 필의 바이올린 파트는 이 음반에서는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지 않고 부드럽지만 화려한 음색을 맘껏 뽐내는 스타일이다. 제 2주제의 재현부의 끝에 등장하는 목관 및 호른의 ff와 이를 받는 트럼펫-팀파니의 f는 트럼펫보다는 팀파니가 강조되어 있긴 하다.

제 3악장 Presto
3악장 프레스토(Presto)는 위풍당당하고 역동적인 스케르초 형식의 악장이다. 시작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중독성 있는 리듬이 화려하게 펼쳐지다가 밝고 목가적인 선율이 흐르고 다시 긴장과 이완이 반복된다. 이후 원래의 주제를 강렬하게 들려주며 열기를 발산한 다음 끝을 맺는다.

스케르초에 해당하는데, 이렇게 가 장조 곡에서 바 장조 스케르초가 있는 것은 드문 일이다. 또한 트리오(라 장조인 것도 이례적이다. 아사이 메노 프레스토)가 두 번 나온다({교향곡 4번}의 스케르초와 같다). 이 트리오에서는 밝고 따스하며 민요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 선율은 오스트리아 지방의 순례의 노래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스케르초에서는 강약 대비나 쉼표, 또는 스타카토를 교묘하게 사용하고 있다.
중요한 91번째 마디에서는 트럼펫의 존재가 또렷이 감지되고 이 장점은 재현부인 351번째 마디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이미 지적한 템포 때문에 그 반가움은 반감된다. 많은 음반들이 다른 악장들과는 달리 유별나게 트리오에서 음량을 지나치게 키웠던 것과는 달리 - 아마도 이 부분이 금관의 테크닉이 쉬운 모양이다 - 트리오의 클라이막스는 상대적으로 조금 절제되어 있다.

제 4악장 Allegro con brio
4악장 알레그로 콘 브리오(Allegro con brio)는 휘몰아치는 리듬과 폭발적인 사운드가 압도하는 악장이다. 베토벤도 이 악장에 대해 “나는 인류를 위해 좋은 술을 빚는 바쿠스(디오니소스)이며, 그렇게 빚어진 술로 세상의 풍파에 시달린 사람들을 취하게 하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곡은 처음부터 파워풀하게 시작해 강렬한 전개를 이어나간다. 반면 바이올린이 제시하는 제 2주제는 재기발랄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다시 주제 리듬을 반복하며 가공할 힘으로 극한까지 몰아붙이면서 광란의 분위기를 연출하다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소나타 형식. 힘찬 화음에 이어 1주제가 연주되는데, 러시아 민요에서 따온 것이라고도 한다. 베토벤은 {라주모프스키 현악 4중주}를 작곡하기 이전에 러시아 민요집을 갖고 있었다. 2주제는 약동적이며 유머러스하다. 발전부는 주로 1주제의 전개로 이루어지고, 재현부는 내림 나 장조로 1주제가 재현되고 곧 바 장조로 바뀌어 2주제가 첼로로 재현된다. 이어지는 코다는 전개풍으로 장대하다.
카라얀의 4악장은 베토벤 7번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꼭 들어봐야 할 연주라고 생각한다. 특히 클라이버의 음반을 좋아하시는 분께는 베토벤이 악보에서 의도했던 바는 바로 이런 4악장입니다라고 제일 먼저 들려주고 싶은 연주이기도 하다. 마치 콩쿨대회에서 1등은 틀리지 않고 해낸 사람이 2등은 조금 틀렸지만 해석이 훌륭한 사람이 차지하듯이 테크닉면에서 번스타인/빈 필보다 간발의 차이로 쳐져서 비록 베스트에 꼽히지 못했지만 4악장 자체의 해석은 가장 훌륭하다. 카라얀의 4악장은 비교음반 중 가장 흥분되어 있고 가장 파워풀하다.
자신의 음악적인 적들에게 여기 내가 간다!라고 분노에 찬 외침과 욕설을 퍼붓듯이 제시부 직전의 두 번의 걸친 ff의 울림은 비교음반 중 최고의 음량을 가진 트럼펫의 또렷한 아티큘레이션으로 무시무시하리 만큼 강조되어있다. 뒤이은 sf들에서도 트럼펫은 또렷하게 팀파니와 같이 진행하고 첫번째 4악장의 주제 리듬은 아쉽게도 호른이 주가 되지만 도돌이표에 의한 두번째 울림부터는 트럼펫이 처리하고 있고 이어지는 그 리듬의 반복에선 트럼펫이 완벽하게 불러낸다. 제 2주제도 f부분이 강조되면서 앞서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종결부로 넘어가면 예의 그 트럼펫은 기가 한풀 꺽여서 강렬함이 많이 수그러들어 버린다.
전개부의 시작도 조금 약하지만 곧이어 sf에서는 트럼펫과 팀파니가 화려한 울림을 유감없이 들려주고 카라얀이 택한 쑤셔 박는 듯한 빠른 템포가 이런 화려함에 보태지면서 질주하는 듯한 스피드감을 한껏 살려낸다. 재현부의 시작은 다시 제시부처럼 완벽해지고 계속해서 밀어 부치는 템포는 270번째 마디에 이르러 마치 말을 타고 광야를 누비는 듯한 질주하는 쾌감을 활기찬 현으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코다시작 부분에 트럼펫의 아티큘레이션이 한번 흐려져버리는 부분이 발견되는 것은 정말 안타깝다.
곧 트럼펫은 자신의 본모습을 되찾아서 또렷한 아티큘레이션으로 코다의 클라이막스를 준비해간다. 토스카니니, 푸르트벵글러, 번스타인의 녹음들처럼 fff전에 미리 트럼펫의 음량을 충분히 살려 놓지 않고 fff에 이르러서야 맘껏 음량을 키우게 하는 방법은 스케일을 충분히 살려내지 못하는 단점이 있는데 카라얀이 후자를 택하고 있는 것은 아쉽다. 이 부분에서 아무리 크리센도를 미리 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데 말이다. 그래서 4악장 코다의 충분한 다이나믹은 조금 아쉽다. 여기엔 팀파니가 크리센도에서 충분히 흥분되어있지 않다는 점도 작용한다. 엔딩은 트럼펫이 줄기차게 최강음을 내뿜으면서 짜릿하게 마무리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