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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ra 공부해보아요

Dowland: Second Booke of Songes, 1600 - I Saw My Lady Weep · Justin Burwood · Rosemary Hodgson


Dowland: Second Booke of Songes, 1600 - I Saw My Lady Weep · Justin Burwood · Rosemary Hodgson


Dowland: Second Booke of Songes, 1600 - I Saw My Lady Weep
존 다울랜드 내 여인의 눈물을 보았네
John Dowland 1563~1626 영국

2nd Book of Songs: No. 1, I Saw My Lady Weep

Dowland: Sorrow Stay
℗ 2012 Australian Broadcasting Corporation
Released on: 2012-08-03

Justin Burwood, tenor · Rosemary Hodgson, lute
     
영국의 황금시기 엘리자베스 시대에 성행했던 류트(Lute)음악의 명연주자이자 대 작곡가.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전역에서 당시 류트의 최대 명연주가로서 이름을 떨쳤으며, 가곡 작곡가로서도 초기 예술가곡의 발전에 힘써 역사상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더블린 근교에서 태어난 다울랜드는 원래 아일랜드인 이었으나 일찍이 영국에 정착했다. 그의 교육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단지 17세 때인 1579년 무렵부터 프랑스의 영국대사 헨리 코밤(Cobham)경을 따라 파리 둥지를 다녔으며, 파리에 있는 동안 가톨릭을 신봉하게 되었다. 1588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류트 음악에 관한 깊은 연구와 창작활동을 벌여 나갔다. 1594년부터 1595년에 걸쳐 영국 여왕의 류트주자가 죽자 그 자리에 응시했으나 거절 당하고 그 쓰라린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탈리아, 베네치아, 페라라, 피렌체등에 다니면서 당대의 거장 마렌치오를 만났다.
(1603),[A Pilgrimes Solace](제4권,1612)외에 80여곡의 가곡을 통해서 그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왕조의 센티멘트와 유머를 노래하고, 근세 가곡예술의 막을 열었다. 다울랜드가 남긴 대부분의 곡들은 모두가 류트를 위한 독주곡이거나 류트 반주를 곁들인 가곡들이다.아름다운 선율, 열정적인 슬픈 노래, 대담한 화성법, 독립성이 높은 류트 반주는 시대를 초월하는 아름다움이 있고, 일부 작품은 오늘날까지 애창되고 있다. 또한 당시 특히 유명했던 가곡[흘러라 나의 눈물](Flow my teares)을 자신이 기악합주용으로 편곡한 7개의[눈물의 파반 Lachrimae Pavan]도 오늘날까지 연주되고 있는 특이한 구성을 갖고 있는 음악이다. 그 외[Come again, sweet love doth now invite],[Fine Knacks for Ladies],[I saw my Lady Weep]등의 노래가 유명하다.
     
I saw my lady weep
I saw my lady weep,
And Sorrow proud to be advanced so,
In those fair eyes where all perfections keep,
Her face was full of woe;
But such a woe (believe me) as wins more hearts,
Than Mirth can do with her enticing parts.
Sorrow was there made fair,
And Passion wise, tears a delightful thing,
Silence beyond all speech a wisdom rare,
She made her sighs to sing,
And all things with so sweet a sadness move,
As made my heart at once both grieve and love.
O fairer than aught else,
The world can show, leave off in time to grieve,
Enough, enough, your joyful looks excels,
Tears kills the heart.
O strive not to be excellent in woe,
Which only breeds your beauty's overthrow.
Arthur Quiller-Couch, ed. 1919.
The Oxford Book of English Verse: 1250–1900.

     
존 다울랜드 흘러라, 나의 눈물이여
Flow, my tears
영국 르네상스 음악의 대표주자 존 다울랜드의 에어 〈흘러라, 나의 눈물이여〉는 류트 반주에 붙인 독창 노래로 슬픔의 정서를 하행하는 멜로디에 서정적으로 담아냈다. 이 노래 선율은 기악곡 〈라크리메, 혹은 일곱 개의 눈물〉의 모티브로 사용되었다.

17세기 영국 멜랑콜리의 미학
존 다울랜드는 1562년경에 태어나 1626년에 세상을 떠난 영국의 류트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다. 뛰어난 재능과 실력에도 불구하고 영국 왕실에 입성하지 못했던 그는 젊은 시절 덴마크를 비롯해 유럽 여러 나라를 떠돌며 보냈다. 그는 50대가 넘어서인 1612년에야 영국 궁정 음악가로 임명되었는데, 그 후로는 제임스 1세의 지지를 받으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왕실에서 활동했다. 오랜 세월, 고국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타지 생활을 해야 했던 설움과 비애는 다울랜드의 음악에 그대로 반영되었는데, 특히 류트 반주가 붙는 세속 노래인 에어(air)에는 이러한 슬픔의 정서가 잘 드러나 있다.
다울랜드의 에어는 서정적인 가사와 그에 어울리는 구슬픈 멜로디로 대중의 감수성을 자극한다. 그는 〈다시 오라〉, 〈어둠속에서 살고 싶어〉 같은 서정적인 노래들을 남겼다. 이 작품들로 인해 다울랜드의 이름 앞에는 ‘17세기 멜랑콜리의 진수’, ‘눈물의 작곡가’ 등의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그중에서 〈흘러라, 나의 눈물이여〉는 가장 유명한 곡으로 1600년에 출판된 《에어 작품집 2권》에 수록되었다. 이후 1604년경 다울랜드는 이 노래 선율을 테마로 한 비올 합주곡 〈라크리메, 혹은 일곱 개의 눈물〉을 작곡한다. 또한 20세기 영국 작곡가에게도 영향을 주었는데 벤자민 브리튼도 비올라를 위한 자신의 〈라크리메〉에 이 선율을 인용했다.


하행하는 선율에 담은 슬픔
〈흘러라, 나의 눈물이여〉의 첫 부분 가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흘러라 눈물이여, 한없이 흘러라
영원히 추방되어, 비탄에 잠기게 하오
한 밤중 까마귀가 불길하게 우는 곳에, 외로이 살으리.
첫 가사인 “흘러라”는 순차적으로 하행하는 멜로디 ‘라-솔-파-미’로 시작한다. 이러한 음형은 눈물이 뺨을 타고 아래로 흐르는 모습을 묘사하는 일종의 가사 그리기 기법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가사 그리기는 이탈리아 마드리갈에서 유행하던 기법으로, 한때 이탈리아에도 머물렀던 다울랜드가 이 장르의 대가였던 루카 마렌치오나 오를란도 디 라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하행하는 선율 자체가 당시에 유행하던 라멘트(비가)의 전형적인 형태의 하나로 슬픔을 상징한다.
ⓒ 음악세계 & 음악사연구회(사)
Flow, my tears, fall from your springs!
Exiled for ever, let me mourn;
Where night's black bird her sad infamy sings,
There let me live forlorn.

Down vain lights, shine you no more!
No nights are dark enough for those
That in despair their last fortunes deplore.
Light doth but shame disclose.

Never may my woes be relieved,
Since pity is fled;
And tears and sighs and groans my weary days, my weary days
Of all joys have deprived.

From the highest spire of contentment
My fortune is thrown;
And fear and grief and pain for my deserts, for my deserts
Are my hopes, since hope is gone.

Hark! you shadows that in darkness dwell,
Learn to contemn light
Happy, happy they that in hell
Feel not the world's despite.
흘러라 눈물이여 한없이 흘러라
영원히 추방되어 비탄에 잠기게 하오
한밤중 까마귀가 불길하게 우는 곳에
외로이 살으리.

헛된 빛들아, 그 빛을 멈추어라!!
깊은 밤의 어둠도 감출 수 없는,
절망 속에서 잃어버린 행운을 한탄하는 이들에게
빛은 그 부끄러움을 드러낼 뿐이니.

나의 불행을 위로하지 마시오
연민은 끝났으므로.
눈물과 한숨과 신음으로 지새운 날들
모든 기쁨은 사라졌네.

기쁨의 절정에서
나의 행운은 사라졌네
두려움과 비탄과 고통의 황야만이
나의 희망이네 모든 희망은 사라졌으므로.

듣거라! 어둠의 그림자여
빛을 경멸하라.
기쁘게, 기쁘게 지옥에서
세상의 경멸을 무시하라.
*다울랜드의 류트가곡 흘러라, 나의 눈물은 에어 모음집 제2권에 수록된 서정미 넘친 선율을 지닌 가곡으로 그 당시 대륙에까지 유행한 힛트 송이다.

영국 작곡가 John Dowland (1563 - 1626)의 음악에 "Lachrimae" 혹은 "7개의 눈물 Seaven Teares (Seven Tears)" 라는 곡이 있다. 어찌 눈물의 종류가 그 뿐일까마는 sorrowful music의 전공자(?) Dowland는 자신의 이름에 조차 semper dolens (always grieving)라 단서를 달아 놓을 정도로 멜랑콜리한 음악으로 그 시대에 잘 알려져있었다.
혹자는 그의 슬픈 음악들이 그가 궁정의 악사로서 오랫동안 자리를 얻지 못한 이유라 하지만 그는 Denmark의 궁정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 lutenist 이었다. 그러나 그는 알콜 중독으로 항상 돈이 부족하여 가불을 받아가곤 했다는데 결국엔 그가 원래 원했던 것 처럼 영국 왕실의 lute 악사로 임명을 받는다. 7가지의 눈물 중 첫곡은 그의 곡 Flow my tears (흘러라 나의 눈물) 라는 당시 잘 알려진 노래에서 빌린 것이니 "Antiquae" 라는 이름이 이해가 가지만 다른 곡들의 이름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Lachrimae" or "Seven Teares
Dowland의 7개의 눈물
Lachrimae Antiquae (옛 눈물)
Lachrimae Antiquae Novae (새로운 옛 눈물)
Lachrimae Gementes (한숨의 눈물)
Lachrimae Tristes (슬픈 눈물)
Lachrimae Coactae (거짓 눈물)
Lachrimae Amantis (연인의 눈물)
Lachrimae Verae (진실의 눈물)
들어보면 알겠으나 7곡 모두 처음 7 마디가 같은 theme, Flow my tears의 기본 멜로디로 시작한다. 라크리메(Lachrimae)는 번역하자면 눈물이라는 ..정확히 말하자면, "류트와 비올라를 위한 일곱 개의 눈물" 이라는 아주 문학적인 제목의 조곡으로 당시 특히 유명했으며 가곡 "흘러라 나의 눈물(Flow my teares)"을 자신이 기악 합주용으로 편곡하여 오늘날까지 연주되고 있는 다소 좀 특이한 구성을 갖고 있는 음악이다.

류트 가곡집 제 2권에 수록되어 있는 성악곡 "Flow my teares"(흘러라 나의 눈물이여)와 이 곡을 류트와 비올을 위한 7곡의 파반느 양식 기악곡으로 편곡하여 1604년의 작품집에 수록 발표한 "Lachrimae" or "Seven Teares" (라크리메) 혹은 (일곱개의 눈물) ​
'존 다울랜드'는 영국의 종교개혁 단행과 과도한 여성편력, 여섯 번의 결혼으로 악명높은 '헨리 8세'와 천일의 앤으로 알려진 '앤 불린'의 딸로 태어나 피의 메리로 불리우는 이복언니 '메리 1세'의 뒤를 이어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하고 영국의 황금기를 연 처녀여왕, 튜더왕조의 마지막 군주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1533년 ~ 1603)와 후임자로 스튜어트 왕조의 막을 연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 James Charles Stuart 1566 ~ 1625)시대에 영국에서 명성이 높았던 류트 연주자이자 작곡가다. ​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 ~ 1616)와도 동시대를 산 그는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영국 왕실의 인정을 받지 못하여 1580년 경부터 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의 국가에서 활동하며 지내다 1598∼1606년에는 덴마크 왕실에서 크리스티안 4세를 위한 궁정 류트 연주자로 지냈으며 종교적 문제가 해결된 후 영국으로 돌아와 1612∼1626년까지 스튜어드 왕조 제임스 1세의 왕실 전속 류트 연주자로 봉직하였다. ​
다울랜드는 성악곡 "Flow my teares"(흘러라 나의 눈물이여)와 같은 구성의 류트 독주곡 눈물의 파반느도 비슷한 시기에 작곡하였는데 둘 중 어느곡이 원곡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 두 곡은 유럽 전역에서 크게 인기를 얻어 다울랜드 자신을 포함하여 동시대 다른 음악가들에 의해서도 편곡되어 여러 버전으로 존재하는데 다울랜드는 1604년에 출판한 작품집을 통해 한 대의 류트와 두 대의 트레블 비올, 두 대의 테너 비올, 한 대의 베이스 비올 구성의 기악곡 "Lachrimae" or "Seven Teares"(라크리메) 혹은 (일곱개의 눈물)을 발표했다. ​
"Flow my teares"(흘러라 나의 눈물이여)와 "Lachrimae" or "Seven Teares"(라크리메) 혹은 (일곱개의 눈물)는 엘리자베스 1세 시대 특유의 염세적이고도 침울함이 감도는 슬픔을 센티멘탈리즘적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탁월한 재주를 지닌 다울랜드가 남긴 수많은 류트 가곡과 류트 독주곡 중에서도 가히 수작이라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류트곡 [ Lute Songs ] : 존 다울런드(John Dowland)
연주자 Charles Daniels (tenor), David Miller (lute)
녹음연도 1997년
레이블 EMI 7243 5 72266 2 2
존 다울런드(1563~1626년)는 1584년, 한 서신에서 파리 주재 영국대사 헨리 코밤의 “신하”로 기록상 처음 등장한다. 그는 1588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음악학사 학위를 받으면서 서서히 음악가로서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1592년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위해 연주를 했던 것 같다. 명성이 높았는데도 1594년 공석이 된 왕실의 류트 연주자 자리에 지원했지만 떨어졌다. 이에 실망한 다울런드는 이탈리아와 독일 등지를 여행한 후 1598년에 덴마크의 크리스티앙 4세의 궁정에 정착했다.
그는 1606년에 덴마크를 떠나 고국으로 돌아와 비로소 1612년에 염원했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영국 왕실이 특별히 그를 위해 직위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영국의 류트 곡을 총 네 권의 음악집으로 집대성해 하나의 장르로 확립시킨 공은 다울런드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제1권, 제2권, 제3권(각각 1597년, 1600년, 1603년)과 마지막 《순례자의 위안》(1612년)이 바로 그것이다. 초기 곡들은 4성부와 류트를 위해 만들어졌다(그래서 가수들만 연주하거나 높은 성부를 독창으로 부르고 류트로 반주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점점 독창용으로 곡을 만들게 되었고 후기에 만든 독창곡은 류트, 트레블 비올과 베이스 비올로 반주를 했다. 뛰어난 류트 연주자인 데이비드 밀러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른 찰스 다니엘스의 목소리는 그가 다울런드의 곡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기교도 일류지만 명확한 발성과 단어의 의미를 잘 표현해서 귀를 즐겁게 해 준다. 그의 노래는 영어에 음악적인 기질이 있음을 잘 보여 준다.
[네이버 지식백과] 류트곡 [Lute Songs]



존 다울랜드 라크리메 혹은 일곱 개의 눈물
Lachrimae or Seven tears
1604년경에 완성된 다울랜드의 〈라크리메, 혹은 일곱 개의 눈물〉은 류트와 비올을 위한 기악 합주곡이다. 다울랜드의 에어 〈흘러라, 나의 눈물이여〉의 선율을 주제로 한 일곱 개의 변주 형식의 파반느에 열네 개의 짧은 춤곡이 포함되어 있다.

〈흘러라, 나의 눈물이여〉 주제에 의한 기악 합주곡
다울랜드가 살았던 엘리자베스 여왕과 제임스 1세 시대는 류트와 비올의 황금기였다. 섬세하고 예민한 음색의 류트로 연주하는 기악곡과 류트 반주로 부르는 독창 노래인 에어의 인기가 높았고, 저음부터 고음까지 다양한 음역대별로 포진되어 있는 비올 합주도 성행했다. 〈라크리메, 혹은 일곱 개의 눈물〉은 류트와 비올을 위한 기악 합주곡으로, 1604년경에 완성되었으며 독주 악기처럼 사용되는 한 대의 류트와 다섯 대의 비올로 연주한다.
이 곡은 ‘일곱 개의 눈물’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느린 춤곡인 파반느 형식으로 만들어진 일곱 개의 악곡이 중심을 이룬다. 일곱 개의 파반느에는 서로 다른 종류의 눈물을 뜻하는 부제가 붙어 있으며, 각곡의 부제는 ‘옛날의 눈물’, ‘옛날의 새로운 눈물’, ‘탄식의 눈물’, ‘슬픔의 눈물’, ‘거짓된 눈물’, ‘연인의 눈물’, ‘진실의 눈물’이다.
〈라크리메, 혹은 일곱 개의 눈물〉에는 파반느 형식의 일곱 개 변주곡 외에도 열네 개의 짧은 소품 악곡이 포함되어 있다. 그중에는 느린 춤곡인 파반느와 대조적으로 빠른 춤곡으로 짝을 지어 나오는 갈리아드가 가장 많고 그 밖에 자유로운 제목을 지닌 다양한 악곡들도 등장한다. 주로 경쾌하고 민속적인 분위기로 펼쳐지면서 파반느의 무거운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울랜드의 시대에는 연주회의 상황이나 목적에 따라 연주 순서를 자유롭게 변경했는데 일곱 개의 변주곡을 모두 연주한 후에 나머지 곡을 연주하기도 하고, 일곱 개의 변주 사이사이에 소품을 끼워서 연주하기도 했다.


화성과 장식음이 강조된 기악곡으로 재탄생
이 일곱 개의 파반느는 모두 다울랜드가 작곡한 에어 〈흘러라, 나의 눈물이여〉 선율을 주제로 변주한 것이다. 일곱 개의 변주에 모두 같은 주제 선율이 등장하지만, 그 분위기와 느낌은 조금씩 다르다. 원곡인 성악곡에 비해 장식음이 많고 현악기의 섬세한 울림이 살아 있으며 폴리포니와 호모포니적인 작법이 사용되었다. 그중에서 두 번째 눈물인 〈옛날의 새로운 눈물〉은 〈옛날의 눈물〉의 화성을 패러디한 형태이며, 다섯 번째 눈물인 〈거짓된 눈물〉 역시 앞서 나오는 네 번째 파반느 〈슬픔의 눈물〉의 화성적인 패러디로 볼 수 있다.
ⓒ 음악세계 & 음악사연구회(사)

John dowland (1563 - 1626)
Dowland 는 셰익 스피어와 같은 영국 Lute음악의 전성기인 Elizabeth 왕조시대 활약했던, 정확한 출생 년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562년에서 1563년 사이에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위대한 Lute주자주자 겸 가수,가곡 작곡가로서 널리 유럽에 그 이름을 떨쳤다.그리고, 영국 최초의 대 작곡가 헨리 퍼셀(H.Purcell)과 함께 음악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기타 리스트에게는 더없이 중요하고 친밀한 인물이 아닐 수 없는데, 1697년 영국에서 가곡집 제 1권을 출판했으며 케임브릿지 대학으로부터 음악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다. 그의 곡 중에는 덴마아크왕을 위한 갈리아드가 다수 있는데, 1598년 덴마아크왕 크리스챤 4세의 직속 Lute주자로 임명되면서 수 차례 영국과 덴마아크를 왕래했던 시기에 출판된 3권의 곡집에 수록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1612년 10월에 대망의 영국왕 류트 주자로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그 위치를 지켰으며, 72곡의 大小 Lute작품을 남겼고, 엘리자베스 왕조 음악을 대표하는" 눈물의 파반" "멜랑콜리 갈리아드"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작품 중에 가장 주목되는 환상곡(Fantasy) 여섯 개를 높이 평가하지만, 특히 Forlorn Hope라는 환상곡은 절품이라고 한다. 미출판된 그의 작품들은 세계적으로 유수한 대학(Oxford, Cambridge, Yale, Pennsylvania)과 출판사의 소장으로 되어 있는데 머지 않은 장래에 출판되리라 한다.
Dowland는 1595년에 이탤리를 여행하며 외향적인 이탤리 노래를 들었다. 이 노래에서 류트는 엄격하게 성악의 보조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그는 노래보다도 성악가를 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효과를 노리는 이 수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대신에 다울랜드는 성악과 류트 사이의 내성적인 대화 (이를테면 In darkness let me dwell)를 발전시켜서 당시 영국의 독특한 예술 형식을 창작했던 것이었다. 가사는 항상 잘 들리고 이해되며 음악은 서정적 내용을 바꾸어 가지만 성악가가 독자적으로 시를 마음대로 처리하기에는 불가능하였다. 그 결과 음악과 시의 완벽한 융합이 가능하게 되었으나 성악가는 단순한 하인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