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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ra 공부해보아요

Schubert: Heidenröslein D257 · Sumi Jo · Clara-Jumi Kang · Wen Xiao Zheng · Klaus-Dieter Barandt · Christopher Park

Schubert: Heidenröslein D257 · Sumi Jo · Clara-Jumi Kang · Wen Xiao Zheng · Klaus-Dieter Barandt · Christopher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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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ubert: Heidenröslein, D. 257 (Op.3/3)
슈베르트 들장미 D.257
Franz Peter Schubert, 1797-1828 ​오스트리아

Ich Liebe Dich
℗ 2010 Universal Music Ltd.
Released on: 2010-01-01

Sumi Jo · Clara-Jumi Kang · Wen Xiao Zheng · Klaus-Dieter Barandt · Christopher Park
     
슈베르트의 들장미와 베르너의 들장미는 다른 곡입니다.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의 <월계꽃> 과 베르너의 <들장미>는 우리나라 곡명은 다르지만 가사는 모두 볼프강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시 '들장미 / 하이덴뢰슬라인: Heiden-röslein'입니다. 이 노래는 괴테가 젊은 시절 쉬트라스부르크에서 대학에 다닐 때, 프리데리케라는 아가씨를 사랑하던 시절에 쓴 시로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이 시는 슈베르트를 비롯한 여러 작곡가에 의해 작곡이 되었는데, 베르너 Heinrich Werner가 작곡한 이 노래가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슈베르트 들장미
Heidenröslein D.257 (Op.3-3)
1815년 한 해 동안 19살의 슈베르트는 엄청난 양의 리트를 썼다. 특히 이 해에 그는 집중적으로 괴테의 시에 음악을 붙였다. 슈베르트의 리트 중에서도 소박하고 단순한 멜로디로 사랑받는 〈들장미〉는 바로 그 해에 작곡된 괴테 리트 중 한 곡이다.

Heidenröslein
Sah ein Knab' ein Röslein stehn,
Röslein auf der Heiden,
War so jung und morgenschön,
Lief er schnell es nah zu sehn,
Sah's mit vielen Freuden.
Röslein, Röslein, Röslein rot,
Röslein auf der Heiden.

Knabe sprach: "Ich breche dich,
Röslein auf der Heiden."
Röslein sprach: "Ich steche dich,
Dass du ewig denkst an mich,
Und ich will's nicht leiden."
Röslein, Röslein, Röslein rot,
Röslein auf der Heiden.

Und der wilde Knabe brach's
Röslein auf der Heiden;
Röslein wehrte sich und stach,
Half ihr doch kein Weh und Ach,
Musste es eben leiden.
Röslein, Röslein, Röslein rot,
Röslein auf der Heiden.
Literal translation
Once a boy saw a little rose standing,
Little rose of the field,
It was so young and beautiful,
He dashed there quickly to see it near,
Beholden with abundant joy,
Little rose, little rose, little rose red,
Little rose of the field.

The boy then said: "I shall pick thee,
Little rose of the field."
The little rose said: "I shall stick thee,
That thou'lt always think of me,
And, I'll not want to suffer it."
Little rose, little rose, little rose red,
Little rose of the field.

Still the rough boy picked the rose,
Little rose of the field.
The little rose fought thus and pricked,
No prose of pain could help her,
Alas, it must suffer it yet.
Little rose, little rose, little rose red,
Little rose of the field.
Poetic translation
Once a boy a Rosebud spied,
Heathrose fair and tender,
All array'd in youthful pride,–
Quickly to the spot he hied,
Ravished by her splendour.
Rosebud, rosebud, rosebud red,
Heathrose fair and tender!

Said the boy, "I'll now pick thee,
Heathrose fair and tender!"
Said the rosebud, "I'll prick thee,
So that thou'lt remember me,
Ne'er will I surrender!"
Rosebud, rosebud, rosebud red,
Heathrose fair and tender!

Now the cruel boy must pick
Heathrose fair and tender;
Rosebud did her best to prick,–
Vain 'twas 'gainst her fate to kick–
She must needs surrender.
Rosebud, rosebud, rosebud red,
Heathrose fair and tender!

단순함과 자연스러움을 찾아서
괴테의 시 대부분이 만들어졌던 18세기 후반, ‘자연스러움’과 ‘단순함’은 모든 노래가 표상해야할 이상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그것은 괴테가 굳건히 믿고 있던 노래의 이상이기도 했기 때문에, 괴테는 단순한 반주에 유절형식(하나의 선율을 반복하여 가사가 여러 개의 절로 나뉘는 노래의 형식)으로 된 노래들을 좋아했다. 실제로 괴테와 평생 우정을 나누었던 작곡가 칼 프리드리히 첼터의 노래들은 대부분 피아노 반주와 유절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야망에 찬 젊은 작곡가 슈베르트에게 이러한 단순한 민요양식은 자신의 예술적 이상에 부합하지 않는 형식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슈베르트가 작곡한 리트들은 대부분의 경우, 어려운 피아노 반주와 복잡하게 얽혀있는 화성 진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슈베르트도 잠시 자신의 생각을 접고, 1814년에서 1816년 사이 민요양식에 대한 탐색을 시도한다. 그는 이 시기 100여곡에 이르는 유절 리트들을 작곡하며 ‘단순한 노래’에 푹 빠진다. 〈들장미〉는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장미의 빼앗긴 순결
이 노래의 단순함 뒤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충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시는 표면적으로 한 소년의 거절당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시의 1연(노래의 1절)에서 소년은 들판에 핀 장미를 보고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장미에게 다가간다. 소년과 장미는 다음과 같이 말을 주고받는다(2연).
소년: “나는 너를 꺾어버릴 거야”
장미: “그럼 나는 내 가시로 너를 찌를 거야. 네가 나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소년은 결국 장미를 꺾어버리고, 가시에 찔려 붉은 피를 흘린다(3연). 노래의 후렴구, “들장미, 들장미, 붉은 들장미(Röslein, Röslein, Röslein rot)”에 등장하는 ‘붉은 색’이 소년의 손가락에서 난 피를 의미한다는 것은 시의 마지막 연에 이르러서이다. 들장미로 형상화되는 태초의 순수성(혹은 처녀성)은 그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으로 인해 파괴되고, 서로의 육체에는 잊히지 않는 흔적이 남음으로써, 그것은 하나의 ‘기억’이 된다. 슈베르트는 이 시에 담긴 충격적인 이야기를 그와 정반대의 분위기를 풍기는 단순한 음악과 어울리게 함으로써, 예술적인 단순함과 복잡함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
ⓒ 음악세계 & 음악사연구회(사)



괴테와 음악
같은 가사에 여러 가지 선율을
프란츠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는 1815년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시에 의한 가곡 [들장미]를 작곡했다. 괴테가 22세 때인 1771년 쓴 시에 곡을 붙인 노래다. 1절 가사는 비교적 간명하고 소박하다.
소년이 장미를 보았다.
들판의 장미를.
장미는 어리고 아침이어서 아름다웠다.
소년은 달려가서 가까이 보았다.
기쁨에 차서 보았다.
붉은 장미, 장미,
들판의 장미.
1829년에는 독일 튀링엔의 작곡가 하인리히 베르너가 같은 시에 곡을 붙여 발표했다. 작은 지역사회에서 오르가니스트 겸 합창 지도자로 활동한 작곡가였지만, 그가 작곡한 [들장미]는 큰 인기를 끌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 곳곳의 합창 모임에서 널리 불려지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이 노래를 작곡할 시점에는 같은 시에 곡을 붙인 작품이 슈베르트의 곡을 포함해 무려 100곡이 넘게 나와 있었다는 사실이다. 베르너의 곡은 그 중 ‘인기 1등’을 차지했다. 2박자의 경쾌한 선율을 가진 슈베르트의 곡과 달리 베르너의 노래는 6박자의 잔잔하고 애조를 띤 멜로디로 진행된다.
베르너 ‘들장미’의 인기 비결은 외우기 쉽고 합창으로 부르기 좋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괴테의 시가 지닌 놀라운 인기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청춘의 실수가 죄책감으로 표현된 ‘들장미’
음악사를 살펴보면 종종 하나의 동일한 가사 또는 명시(名詩)가 여러 작곡가에 의해 음악작품으로 재탄생한 경우를 볼 수 있다. 똑같은 문학적 상념이 시대에 따라, 작곡가의 개성과 수법에 따라 각기 다른 색채와 분위기로 해석되는 점이 비교의 재미를 준다.
여러 명곡으로 거듭 재해석된 텍스트로는 특히 독일이 자랑하는 고전주의 대문호 괴테의 작품이 많아 흥미롭다. 음악사상의 낭만주의 시대인 19세기를 관통하는 괴테의 거대한 영향력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고,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는 괴테 문학의 성격 때문일 수도 있다.
[들장미]는 슈베르트와 베르너의 곡 모두 같은 선율을 1, 2, 3절에 사용하는 유절가곡(有節歌曲)이어서 학교나 노래 동호회에서는 1절만 부르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 노래의 2, 3절은 흥미를 갖고 들여다 볼만한 가치가 있다. 1절만을 기억하고 있다가는 깜짝 놀랄 ‘반전’이 있는 것이다.
소년은 말했다. “너를 꺾을 거야. 들판의 장미야.”/ 장미는 말했다. “너를 찌를 거야. 네가 영원히 나를 기억하도록.” (2절)
그리고 소년은 꺾었다. 들판의 장미를./ 장미는 찔렀다. 가시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3절)
이 2, 3절에서는 1절에서 예상하기 힘든 상처와 보복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동요풍의 평화로운 정경이 어떻게 해서 ‘피를 보는’ 상황으로 발전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괴테의 청춘기 체험과 관련된다.
괴테는 크고 작은 나라들로 분열되어있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덟 살에 시를 짓고 열세 살에 시집을 내는 등 일찌감치 조숙한 천재의 면모를 보였다. 세상은 때로 예술가의 여성편력을 창조력의 원천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괴테의 일생은 이런 시각에 잘 들어맞는다. 시작된 시기도 빨라서 15세의 나이에 그가 사랑에 빠졌던 그레첸이라는 소녀는 훗날 대작 [파우스트]의 여주인공 이름으로 형상화된다.
21세 때 괴테는 법학 공부를 마치기 위해 오늘날 프랑스령이 된 스트라스부르크(스트라스부르)로 향한다. 인근 마을에 놀러 갔다가 목사의 딸이었던 프레데리케 브리온이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하지만 열 달도 못 되어 괴테는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이 지역을 떠났다. 프레데리케가 상처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청년 괴테 역시 청순한 소녀의 순정을 짓밟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이 기억이 상처와 보복의 드라마인 시 [들장미]로 형상화되었고, 수많은 작곡가들이 곡을 붙여 노래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훗날 프란츠 레하르의 오페레타 [프레데리케](1928)로 형상화되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괴테와 음악 - 같은 가사에 여러 가지 선율을


Goethe, Johann Wolfgang von, 1749 ~ 1832
Heidenröslein
Sah ein Knab' ein Röslein stehn,
Röslein auf der Heiden,
War so jung und morgenschoen,
Lief er schnell, es nah zu sehn,
Sah's mit vielen Freuden.
Röslein, Röslein, Röslein rot,
Röslein auf der Heiden.
Knabe sprach: Ich breche dich,
Röslein auf der Heiden!
Röslein sprach: Ich steche dich,
Da du ewig denkst an mich,
Und ich will's nicht leiden.
Röslein, Röslein, Röslein rot,
Röslein auf der Heiden.
Und der wilde Knabe brach's
Röslein auf der Heiden;
Röslein wehrte sich und stach,
Half ihr doch kein Weh und Ach,
Musst' es eben leiden.
Röslein, Röslein, Röslein rot,
Röslein auf der Heiden. 
한 소년이 장미를 보았다,
들에 핀 장미꽃.
너무도 싱싱하고 해맑아
소년은 가까이 보려고 달려갔다.
기쁨에 겨워 바라보았다.
장미, 장미, 붉은 장미,
들에 핀 장미꽃.
소년이 말했다: 널 꺾을 테야,
들에 핀 장미꽃!
장미가 말했다: 널 찌를테야,
나를 영원히 잊지 못하도록.
난 고통받지 않을 거야.
장미, 장미, 붉은 장미,
들에 핀 장미꽃.
거친 소년은 꺾고 말았다,
들에 핀 장미꽃.
장미는 자신을 방어하며 찔렀다.
하지만 외침 소리도 소용 없이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장미, 장미, 붉은 장미,
들에 핀 장미꽃. 

이 노래는 괴테의「들장미」로서, 우리 모두 친숙하게 잘 알고 있는 노래이다. "웬아이가 보았네, 들에 핀 장미화..."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괴테가 젊은 시절 쉬트라스부르크에서 대학에 다닐 때, 프리데리케라는 아가씨를 사랑하던 시절에 쓴 시로 만들어진 노래이다. 이 시는 슈베르트를 비롯한 여러 작곡가에 의해 작곡이 되었는데, 베르너 Heinrich Werner가 작곡한 이 노래가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1829년에 작곡된 이 곡은 들장미의 아름다움과 순박한 어린이의 서정적인 정감이 깃들인든 노래로 통속적이며 부르기 쉬워 학교나 가정 등에서 널리 불린다. C음을 으뜸음 '도'로 하는 장음계에 의한 노래이다. 8분의 6박자의 두 도막형식으로 된 2부 합창곡이고 빠르기는 안단티노이다.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의 <월계꽃> 과 <들장미>는 곡명은 다르지만 가사는 모두 볼프강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시 '하이덴뢰슬라인:Heiden-röslein'이다.
프리츠 베르너(Fritz Werner)는 작곡가인 동시에 합창 지휘자로서 멘델스존 상을 받은 바 있으며, 1936년부터 베를린과 포츠담에서 교회음악가로 활동했다. 1947년에는 하인리히 쉬츠 합창단을 창설하여 직접 이끌어 서독의 일류 합창단으로 키워냈다.

[들장미]는 1771년 여름 슈트라쓰부르크에서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 생성에 대해서는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어 이 시가 진정 괴테의 작품인지, 그렇다면 또 어디까지가 괴테의 창작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괴테는 이 시를 1789년에 나온 자신의 작품집에 처음으로 수록했는데 그 이전에 이미 이 시는 헤르더의 {독일적인 방식과 예술에 대하여} (1773)의 '오씨안과 고대 민족의 가요에 대한 편지 교환'에 [우화시 Fabelliedchen]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상태였다. 그랬다가 헤르더는 1779년 이 시를 다시 정리해서 [들에 핀 장미. 독일 R schen auf der Heide. Deutsch]의 제목 하에 '구전된 전설에서 Aus der m ndlichen Sage'라는 해설을 붙여 자신의 {민요집}에 수록했다. 헤르더가 이 시를 민요모음집에 수록한 정확한 이유는 알수 없다. 다만 헤르더가 가졌던 민요에 대한 개념이 오늘날의 그것과 다르다는 점은 지적할 수 있다. 헤르더에 있어서 민요는 '민속적인 노래'를 의미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에 부합되는 시가 바로 [들장미]였다. 헤르더는 자신의 민요모음집에 오피츠, 다하 , 플레밍, 클라우디우스 등의 시를 수록했으며 괴테의 담시인 [어부]까지도 포함시켰다. [들장미]와 비슷하게 [아산 아가의 귀부인의 애도가 Klaggeesang von der edlen Frauen des Asan Aga] 역시 괴테의 개작품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채 {민요집}에 처음 실렸다가 1789년 괴테의 전집에 실린 경우이다. 위와 같은 사정에서 연유된 의문이 확연하게 밝혀질 수는 없지만 다음의 추측은 가능하다. 헤르더는 민요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1602년에 나온 파울 폰 데어 앨스트 Paul von der Aelst의 가요집을 접하게 되고, 그 안에서 "그녀는 한 그루 장미나무와 같아라 Sie gleicht wohl einem Rosenstock"로 시작되는 시를 한 편 발견한다. 이 시의 주제는 소녀와 장미나무의 비교였다. 이 시에는 연마다 "Roeslein auf der Heiden"이라는 후렴이 들어 있으며, 또한 2연에서는 '들장미' 모티브의 핵심으로 볼 수 있는 소년에게 꺾이고 말 장미의 운명이 암시되고 있다.
장미는 언제고 꺾이리라,
들에 핀 장미꽃.
아마도 예의바르고 의젓한
한 어린 소년이 그렇게 하리니,
오솔길마저 쓸쓸하게 보이리라.
자애로운 신은 내 마음을 알리라.
그녀는 정직하며, 좋은 가문에서
고귀하게 태어났도다.
Der die R slein wird brechen ab,
Roeslein auf der Heiden,
Das wird wohl tun ein junger Knab
Zuechtig, fein bescheiden,
So stehn die Steglein auch allein,
Der lieb' Gott wei wohl, wen ich mein,
Sie ist so gerecht, von gutem Geschlecht,
Von Ehren hochgeboren.
헤르더는 1770/71년경 위의 시에 자극을 받아 [꽃. 동시 Die Bl te. Ein Kinderlied]를 쓰게 된다. 헤르더의 시에는 아직 장미 상징이 분명히 나타나지 않지만 괴테의 [들장미]의 연 구성과 후렴, 그리고 [들장미]에 고유한 줄거리가 이 시에서 비로소 확립되고 있다. 헤르더는 아마도 장미 상징과 후렴을 지닌 오랜 민요와 자신의 시를 괴테에게 함께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괴테는 그것들에 자극을 받아 [들장미]를 쓴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괴테는 당시 친구들 앞에서 자주 자작시를 낭송하곤 했거니와 자신의 담시를 헤르더에게 들려주었을 것이고, 헤르더는 스스로 밝혔듯이 그 때의 기억을 더듬어 동시와 민속적인 모음생략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일례로 1773년 자신의 {독일적인 방식과 예술에 관하여}에 이 시를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괴테가 이 시를 자신의 작품집에 실었다는 사실은 헤르더가 이 시를 일종의 민요로 본 반면에, 괴테는 당연히 자신의 창작물로 보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헤르더에 있어서 이 시는 오랜 민요 유산과 자신이 또한 결정적인 방식으로 참여한 문학적인 공동작업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괴테의 입장은 달랐다. 이 시에 알맞는 형태를 부여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며, 헤르더의 비예술적인 작품에 예술성을 부여한 것도 다름 아닌 자신이었던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들장미]의 발생사는 괴테에 있어서 특이한 경우가 아니고 오히려 그의 문학 창작의 기본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최초의 예에 불과하다. 괴테는 기존의 시에 자극을 받고 그 시가 불충분하다고 생각되면 거기에 새로운 형태를 부여하곤 했다. 시 분야에서 대표적인 것으로는 {서동시집 West- stlichen Divan}이 그러하고, 드라마 분야에서는 {이피게니 Iphgenie}와 {파우스트 Faust}가 또한 그러하다. 괴테에게는 이처럼 전래의 것을 새롭게 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헤르더의 [꽃]은 도덕적인 의도를 지닌 동시이다. 이 시는 '열매를 맺도록 꽃을 일찍 꺾지 말라'는 교훈을 아이들을 위해 우화로 엮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대신에 오래된 민요에 들어 있는 핵심적인 생각인 장미 상징은 희생되고 만다. 그렇게 해서 시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버리고 문학적인 것 대신에 진부하게도 꽃과 열매의 공리적인 관계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괴테가 소재들에서 본 문학적인 가능성은 오래된 민요의 기본 개념으로서의 민속적인 장미 상징의 재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소녀와 장미의 시적인 비유였다. 민요는 장미의 비유를 적절히 발전시키지 못함으로써, 또한 헤르더의 시는 좋은 줄거리를 만들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장미 상징의 정신에서가 아니라 아이들의 도덕심을 유발시키기 위한 산문적인 단계에 머물게 됨으로써 두 편 모두 시의 완성도는 떨어지고 만다. 괴테는 민요의 상징과 헤르더의 줄거리를 모자이크함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완성된 시를 만들어낸 것이다. 헤르더의 [꽃]은 다음과 같다.
꽃. 동시

한 소년이 꽃봉오리를 보았다,
아름다운 나무 위에서.
꽃봉오리가 하도 싱싱하고 아름다워
소년은 그 자리에 선 채 바라보았다.
달콤한 꿈을 꾸며 서 있었다.
꽃봉오리, 꽃봉오리 싱싱하고 아름다운
나무 위에 꽃봉오리.


소년이 말했다: 널 꺽을 테야,
너 달콤한 향기의 꽃봉오리.
꽃봉오리가 빌었다: 날 괴롭히지 말아요.
그러면 곧 시들어버릴 테고
당신에게 열매를 드릴 수가 없잖아요.
소년아, 소년아 내버려 두거라,
달콤한 향기의 꽃봉오리.

하지만 거친 소년은 꺾고 말았다,
나무 위에 꽃을.
그 뒤로 작은 꽃은 곧 죽고 말았다.
그리고 나무에는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
슬퍼하며, 슬퍼하며 소년은 찾았건만
나무 위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오 소년아 너무 일찍 꺾지 말아라,
달콤한 꽃의 희망을.
꽃은 빨리 아 빨리 시드니까.
그리고 나면 너는 어디에서도
네 꽃의 열매를 보지 못하리라.
슬퍼하며, 슬퍼하며 네가 찾아도
이미 때는 늦으니, 꽃도 열매도 없으리라.
Die Bluete. Ein Kinderlied

Es sah ein Knab ein Knoespgen stehn
auf seinem liebsten Baume,
das Kn spgen war so frisch und sch n
und blieb stehn es anzusehn
und stand in s en Traume.
Knoespgen, Knoespgen frisch und sch n
Knoespgen auf der Baume.

Der Knabe sprach: ich breche dich
du Knoespgen s er Duefte.
Das Knoespgen bat: verschone mich,
denn sonst bald verwelke ich
und geb dir nimmer Fr chte.
Knabe, Knabe la es stehn
das Knoespgen s er Duefte.

Jedoch der wilde Knabe brach
die Bluete von dem Baume.
Das Bluetchen starb so schnell darnach,
Aber alle Frucht gebrach
ihm auf seinem Baume.
Traurig, traurig sucht er nach
und fand nichts auf dem Baume.

Brich nicht o Knabe nicht zu frueh
die Hoffnung s er Bluete.
Denn bald ach bald verwelket sie
und denn siehst du nirgends nie
die Frucht von deiner Bluete.
Traurig, traurig suchst du sie
zu spaet, so Frucht als Bluete.
헤르더가 1773년에 발표한 [우화시] 역시 [꽃]과 마찬가지로 아직 불완전하며 괴테의 [들장미]와는 마지막 연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소년은 꺾고 말았다,
들에 핀 장미꽃.
장미는 자신을 방어하며 찔렀다.
그러나 소년은 후에
기쁨과 함께 받은 고통을 잊었다,
들에 핀 장미꽃.
Jedoch der wilde Knabe brach
Das Roeslein etc.
Roeslein wehrte sich und stach,
Aber vergass darnach
Beim Genuss das Leiden
Roeslein etc.
이런 식의 결말에서는 시의 모티브가 '꽃의 운명'이라는 분명한 의식이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오래된 민요에 들은 장미 상징을 소녀의 운명을 위한 상징으로 고양시키는 데도 실패하고 있다. 상징의 중심에는 소년이 아니라 장미가 놓여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꽃을 꺾은 소년의 고통이 아니라 소녀로 비유된 꽃의 운명인 것이다. 따라서 시의 마지막에 소년의 내면적인 태도를 읊은 것은 시의 핵심을 잘못 파악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괴테의 시에 와서야 제대로 표현된다.
이 시의 사건은 화자에 의해서 서사적으로 서술된다. 화자의 보고에 따라 사건은 점진적으로 상승되면서 세 연으로 나뉘어 있다. 첫째, 소년은 꽃을 발견하고 좀더 가까이서 관찰하기 위해 접근한다. 소년은 기뻐한다. 둘째, 소년과 꽃의 대화가 이어진다. 그 속에서 소년은 꽃을 꺾으려고 위협하며 꽃은 격렬하게 저항한다. 세째, 폭력과 방어가 이루어진다. 마지막에 화자는 내부후렴 ("R slein auf der Heiden")과 압운을 이루는 시행 속에서 사건의 진행이 방해받을 수도 돌이킬 수도 없음을 주석으로 상기시킨다 ("Mu t' es eben leiden.") 聯末의 후렴 역시 제목에도 들어 있는 '들장미'라는 말을 되풀이함으로써 사건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화자에 의해서 보고된 사건이 실제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제2연에서 이미 드러난다. 그것은 독자 (혹은 청자)로 하여금 직접 관련된 인물들 저편에서 서술의 목표를 찾아야 한다는 점을 통찰하도록 만든다. 문제의 열쇠는 이 시의 민요적인 요소에 깃들어 있다. 소녀를 꽃에 비유하는 것은 앨스트의 시에 나오고 [들장미]가 그에 자극을 받아 만들어졌다시피 문학적으로 널리 알려진 수사법이다. 꽃을 꺾는 행위 역시 민속문학 뿐만 아니라 중세 때의 유랑자 서정시 Vaganten-Lyrik나 민네장 Minnesang에 빈번히 나타나는 일반적인 메타퍼에 속한다. 이때 꽃은 한 소녀의 운명을 겪는다. 그 효과는 전형화된 인물보다도 훨씬 강하게 나타난다. 제3연의 화자 보고는 이러한 시각을 잘 보여준다. 폭력과 고통은 근원적인 인간 관계 혹은 에로틱한 관계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 되고, 그 속에서 성의 역할은 미리 주어진 운명으로 파악된다. 시에 등장하는 두 인물이 각기 개별화되지 않은 '소년'과 '들장미'라는 것, 외면적으로 매우 억제된 단어 선택 그리고 완전히 동일하게 이루어진 리듬 등은 이 시의 내용에 일종의 보편적인 효용성을 부여한다.


괴테의 담시문학
[들장미]는 괴테가 슈트라쓰부르크 시절 헤르더의 영향을 받아 시도한 최초의 민요조 서정시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시로써 괴테가 그때까지 지니고 있던 로코코적인 이상은 내용면으로나 형식면으로나 일대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괴테에 있어서 민요조 서정시는 처음부터 담시라는 쟝르와 동일시되었다. 따라서 그것은 일인칭 서정시에서 삼인칭 서정시로의, 또한 주관적인 서정시에서 객관적인 서정시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괴테가 헤르더를 위해 엘자쓰에서 수집한 12편의 민요들도 모두 담시의 성격을 띤 것들이었다. 괴테는 이 민요들을 1771년 9월자 편지와 함께 헤르더에게 보냈으며, 헤르더는 그 중에 세 편을 자신의 {민요집}에 수록했다. 헤르더의 민요에 대한 개념은 애매해서 민속적인 것이면 동시대 작가들의 시도 {민요집}에 포함시켰지만 괴테의 방식은 달랐다. 그는 민중 속에 실제로 구전되어 온 것만을 모았고, 자신이 들은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는 헤르더나 후에 {소년의 마술피리 Des Knaben Wunderhorn}를 편집한 브렌타노 Brentano와 아르님 Arnim처럼 작품을 개작하거나 허점을 보완하지도 않았다. 괴테가 담시들을 수집한 것은 당시 민속문학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데 일조했던 영국의 퍼시 Percy의 모범에 따른 것만은 아니었다. 수집된 민요들은 당시 괴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성향, 관심들과 일치하는 것들이었다. 사건, 사랑, 죄, 후회, 죽음, 위대한 운명 등. 그가 채록한 민요들은 16세기, 부분적으로는 더 오랜 시기의 소재와 묘사로 소급된다.
괴테의 담시문학은 이처럼 민속담시로부터 시작된다. 민속담시와 같이 괴테의 담시는 처음에 노래부를 수 있는 담시로 시작되었다가, 고전담시에 와서야 비로소 음악을 염두에 두지 않은 담시로 바뀐다. 또한 민속담시와 마찬가지로 그의 담시에는 악마적인 요소와 마술적인 요소가 짙게 깔려 있다. 그러나 어법에 있어서는 민속담시와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민속담시의 구성이 치밀하지 못하고, 모티브의 나열이 느슨한 반면에 괴테는 모든 것을 필연적이고 간결하게 연관시키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 하나의 상징적인 상황만이 부각된다. 민속담시가 대개 길게 늘어지고 때로는 주제에서 벗어난 서술이 많은 반면 괴테의 담시는 짧다. 더구나 [들장미]의 "morgensch n"이나, [툴레의 왕]의 "Lebensglut"와 같은 합성어는 민속문학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독창적인 표현 속에서 우리는 괴테의 '위대한 찬가의 시대'가 멀지 않음을 예감할 수 있다. 다만 아직은 찬가들에서처럼 작가의 개성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헤르더가 [들장미]를 민요로 보고, 또한 그레트헨이 마치 물레를 돌리며 부르는 노래처럼 [툴레의 왕]을 노래하고 있는 것도 그런 점에서는 한편 정당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