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오스트리아)는 로마 교황 임명의 대사교가 통치하는 가톨릭 세력이 강한 로마풍의 잘츠부르크(Salzburg)에서 1월 27일에 태어났다. 아버지 레오폴트(Leopold Mozart, 1719~1787)는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누나와 동생에게 어려서부터 음악 교육을 시켰는데, 특히 볼프강(오스트리아)은 비상한 음악적 재능을 나타내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신동의 연주 여행
1762년 아버지는 6세인 볼프강(오스트리아)과 11세의 누나 나네를(Nannerl)을 데리고 뮌헨으로 연주 여행을 시도했다. 이것을 필두로 거의 10년간의 소년 시절은 주로 각지를 연주 여행하는 데 소비되었으며, 특히 1763년부터는 파리 · 런던 · 암스테르담으로 3년 동안의 대여행을 하게 된다. 두 사람의 연주회는 각지에서 호평을 받고 그 신동다움을 나타내는 일화는 수없이 남아 있지만, 결국은 곡예의 구경거리 같은 흥미가 중심이었던 것 같다. 그 위에 볼프강(오스트리아)은 자주 병에 걸려 육체의 성장도 방해를 받았으며, 아버지의 만족은 어떻든간에 소년 모차르트(오스트리아)에게는 고난의 여행이었다.
그러나 각지에서 얻은 음악 체험과 서로 교제한 음악가들의 활동은 그의 장래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되었다. 특히 1772년(16세)부터 행한 세 번째 이탈리아 여행은 바로 청년기를 향하는 정신적인 성장기와도 겹쳐 모차르트(오스트리아)의 음악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알렐루야」를 포함하는 유명한 모테트 「엑슐타테 유빌라테」(성악곡)는 이 여행의 산물이었다.
잘츠부르크의 청년 음악가
아버지는 볼프강을 빈의 궁정악단에 취직시키려 했다가 실패하여 고향의 궁정 음악가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 결과 1773년(17세)부터의 약 7년간은 고향에서 활약하는 이른바 잘츠부르크 시대가 찾아온다. 이 시기는 음악가로서의 개성을 단련하기 위한 귀중한 기간으로, 특히 하이든(오스트리아) 형제의 새로운 작품은 커다란 자극이 되어 빈 고전파의 한 사람으로서의 소지가 만들어져 갔다. 1777년(21세)부터는 어머니와 함께 만하임, 파리로 여행을 떠났으며, 특히 만하임의 뛰어난 관현악단으로부터는 커다란 수확을 얻었다.
베버(독일)(Weber) 가의 알로이지아(Aloysia)에게 연심을 품은 것도 이 고장이었으며, 이어서 찾아간 파리는 이미 이전의 신동과는 인연이 없는 차가운 도시로 변했다. 더군다나 어머니 마리아의 타향에서의 죽음과 알로이지아에 대한 구애의 실패는 인간 모차르트(오스트리아)에게 커다란 고뇌를 주는 사건이었다. 1781년(25세) 몰이해한 대사교와 충돌한 그는 잘츠부르크를 떠날 결심을 굳히고 이후 빈에 정주하게 된다. 이 시기의 주요 작품으로는 「바이올린 협주곡 제5번」(1775), 교향곡 제31번 「파리」(교향곡)(1778), G장조와 D장조의 2개의 「플루트 협주곡」(1778), 「바이올린 소나타」 제28번 K.304(1778), 「대관식 미사 Krönungsmesse」(1779) 등을 들 수 있다.
빈에서의 자유로운 활동
자유롭고 활기에 찬 빈에 거처를 정한 1781년 이후는 불멸의 명작을 잇달아 써 갔다. 1782년(26세)에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도주」가 완성되고, 같은 해에는 알로이지아 베버(독일)의 동생 콘스탄체(Constanze)와 결혼한다. 「피아노 협주곡 d단조」(1785)에 이어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오페라)(1786)을 완성, 그 초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같은 해 프라하에서의 상연도 열광적인 성공으로 이것이 인연이 되어 프라하를 방문, 시민들에게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이어 완성된 대작 「돈 조반니」(1787)는 프라하에서 초연되어 「피가로의 결혼」(오페라)에 못지 않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들 대성공이 반드시 경제적인 성공을 의미하지는 않아서 생활은 오히려 곤궁을 더해 갔다. 콘스탄체는 살림을 알뜰히 꾸려 가는 능력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미 장남을 잃은 그는 다시 3남과 아버지 레오폴트의 죽음으로 잇달아 슬픔에 젖었으며, 자기도 중병에 빠지고 있었다. 애수에 찬 「현악 5중주곡 g단조」(1787)는 바로 이런 시기에 작곡되었다. 그리고 세속적인 성공과는 반대인, 습하고 암울한 생활 속에 최후의 4년간을 맞이한다.
궁핍의 만년과 레퀴엠
1788년(32세) 모차르트(오스트리아)의 창작 활동은 그래도 끊임없이 계속되어, 6월부터 기적의 2개월간에 고전 교향곡의 극치를 보여 주는 마지막 3대 교향곡이 완성되어 갔다. 그러나 당시의 빈의 청중이 고도로 완성된 그의 만년의 예술을 이해할 리가 없었다. 궁정 음악가의 칭호도 적은 액수의 연봉을 보증할 따름이었으며, 연주 여행을 비롯한 돈 마련을 위한 시도는 어느 것 하나 성공하지 못했다.
최후의 해인 1791년 7월, 오페라 「마적」의 완성을 가까이 앞둔 모차르트(오스트리아)는 검은 옷을 입은 낯선 남자의 방문을 받고 「레퀴엠」의 작곡을 의뢰받았다. 그 무렵 그는 이미 요독증으로 머리가 혼란해져 있었는데, 이 기묘한 주문이 그에게 죽음이 가까움을 확신시켰다고 한다. 「마적」의 초연은 성공이었으나, 최후의 생명력을 불사른 「레퀴엠」을 미완인 채 놓아 두고 이 세상을 떠난 것은 35세의 12월 5일의 일이었다.
서민적인 천재
장례일은 악천후인 탓도 있어 참석자가 매우 적었다고 전해지며, 게다가 착오 때문인지 이 대음악가가 묻힌 장소는 오늘날까지 불분명한 채로 있다. 그의 천재적인 성품을 나타내는 일화는 많지만 그 영웅다움, 위인다움을 나타내는 이야기는 적은데, 그 오페라의 주인공들의 천진 난만한 인간성은 모차르트(오스트리아)가 서민의 영웅이며 천재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모차르트(오스트리아)의 참다운 위대성은 봉건 사회에서 시민 사회로의 과도기에 있어서 서민적인 생활 태도로 일관하고 다가 오는 시대를 앞서 간 점에 있으며, 그의 천분은 이 역사적인 과정을 거의 무의식중에 음으로 예리하게 포착한 점에 있다고 하겠다. 이 정신은 이윽고 베토벤(독일)의 전투적인 시민 정신으로 계승되어 폭발적으로 연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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