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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umann: Piano Concerto In A Minor, Op.54 · Martha Argerich · National Symphony Orchestra Washington · Mstislav Rostropovich

Schumann: Piano Concerto In A Minor, Op.54 · Martha Argerich · National Symphony Orchestra Washington · Mstislav Rostropovich


Schumann: Piano Concerto In A Minor, Op.54
슈만 피아노 협주곡 Op.54
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1856 독일

Allegro affettuoso
Intermezzo (Andantino grazioso)
Allegro vivace

Schumann: Piano Concerto Op.54; Cello Concerto Op.129
℗ 1978 Deutsche Grammophon GmbH, Berlin
Released on: 1995-01-01
 


Martha Argerich · National Symphony Orchestra Washington · Mstislav Rostropovich
     
슈만 피아노 협주곡 Op.54
이 곡은 클라라에 대한 슈만의 열렬한 사랑 고백이다. 1악장 첫 투티에 이어서 오보에가 노래하는 ‘클라라의 모토’는 가장 달콤한 속삭임이다. 이 주제는 곡 전체에서 다양하게 변형되어 나타난다. 슈만의 정신세계를 대표하는 두 축, 행동하는 인간 ‘플로레스탄’과 꿈꾸는 인간 ‘오이제비우스’가 끊임없이 대화하며 ‘클라라의 모토’를 발전시킨다. 당대 최고의 여류 피아니스트 클라라 비크의 실력에 걸맞게 뛰어난 테크닉을 요구하지만, 낭만적인 시심과 즉흥적인 감상으로 가득한 매력적인 곡이다.
슈만은 클라라와 결혼한 1840년부터 작곡 영역을 확대한다. 피아노 독주곡과 가곡만 써 온 슈만은 그해부터 두 개의 교향곡을 비롯하여 관현악곡과 합창곡까지 손을 넓힌다. 클라라는 “그의 상상력을 피아노에만 가둬 둘 수 없다”고 말했고, 슈만은 이에 화답하여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환상곡(Konzert-Fantasie) A단조를 작곡했다. 이 곡이 아주 맘에 들었던 클라라는 아예 제대로 된 협주곡으로 개작해 달라고 요구했고, 슈만은 4년 뒤인 1845년 간주곡과 피날레를 덧붙여 오늘의 형태로 완성했다.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A단조는 아주 난산이었다.< 1829년에 F단조 협주곡, 1831년에 F장조 협주곡, 1833년에 D단조 협주곡을 스케치한 적이 있지만 매번 첫 부분만 쓰다가 중단했다. 1839년 슈만은 고백했다. “훌륭한 독주자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어떤 협주곡도 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거라면 쓸 수 있지만….” 이토록 소심했던 슈만이 결혼한 뒤 비로소 피아노 협주곡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아내 클라라의 격려 덕분이었을까?
낭만시대의 작곡가이자 평론가로 활약했던 로베르트 슈만은 법학 공부를 중단하고 뒤늦게 전문 피아니스트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20살 전후이던 1829년부터 1831년까지 프리드리히 비크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당시 10대 소녀였던 큰딸 클라라 비크(1819-1896)는 ‘피아노의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클라라는 13살 때 이미 피아노 협주곡 A단조를 작곡하는 등 작곡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슈만이 오케스트레이션을 도와서 완성한 이 협주곡을 그녀는 16살 때 스스로 초연했다. 슈만은 불행히도 손을 다쳐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게 됐다. 그러자 클라라는 슈만의 음악을 대신 연주해서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슈만은 클라라에게 “너는 나의 오른손”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 사이는 자연스레 사랑으로 발전했다.
클라라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의 반대에 맞서 두 사람은 법정투쟁까지 벌여야 했다. 간신히 결혼에 성공하기 전해인 1839년 슈만은 썼다. “우리는 우리 두 사람의 이름으로 많은 작품들을 출판할 것입니다. 후손들은 한마음 한뜻이 된 우리의 작품 중 어느 게 내 것이고 어느 게 당신 것인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요?” 두 사람은 함께 작곡을 했고, 함께 일기를 쓸 정도로 모든 것을 나눈 행복한 부부였다. 결혼 1년, 만삭의 21살 클라라는 남편이 작곡한 환상곡을 1841년 8월 13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초연했다.


Leipzig Gewandhaus Orchestra

이 곡이 낭만시대 최고 수준의 시적 감수성을 가진 곡이라는 걸 제일 먼저 알아본 사람은 클라라였다. 1845년 협주곡으로 완성된 이 곡을 클라라는 그해 12월 드레스덴에서 초연했고, 이듬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신년 음악회를 필두로 유럽 전역에서 환호를 받으며 50여 차례나 연주했다. 결혼 생활이 10년을 넘길 무렵, 슈만은 우울증에 시달린 끝에 라인 강에 투신하는 등 불행한 말년을 향해 달려갔다.
클라라는 아이들이 8명으로 늘어나는 동안 점점 작곡과 멀어져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별로 곡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작곡이 자기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고 말했다. “창조의 기쁨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오직 작곡을 통해서만 자신을 잊을 수 있습니다.” 슈만도 이 점을 잘 이해했고 미안하게 생각했다. “클라라는 아이들을 키워야 했다. 상상 속에서만 사는 남편 곁에 있는 생활은 작곡과 양립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클라라는 규칙적으로 작곡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떠오른 심오한 아이디어들이 기록되지 않고 사라졌음을 생각하면 착잡할 뿐이다.” 클라라는 남편이 죽은 뒤 40년을 더 살며 이 A단조 협주곡을 계속 연주했다. 1856년 슈만이 세상을 떠난 뒤 런던에서 이 곡을 연주했을 때 별로 좋은 평을 받지 못하자 클라라는 크게 낙담했다.
그녀는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에게 3악장 피날레를 개작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요아힘은 지혜롭게도 이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이 곡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결국 슈만이므로 자신이 손을 댈 수 없다는 것. 클라라는 결국 남편의 손길이 오롯이 남아 있는 원곡대로 이 협주곡을 평생 연주했다. 19세기의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기억되는 클라라 슈만, 그녀에게 이 곡은 슈만의 뜨거운 사랑과 아픈 추억, 그 자체였을까...

1악장 알레그로 아페투오소(빠르게, 부드러운, 따뜻한, 사랑스런 마음으로).
원래 독립된 환상곡 이었다. ‘클라라의 모토’가 전곡을 지배한다. 전통적인 협주곡 양식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하게 전개된다.
2악장 인터메조(간주곡), F장조, 3부 형식.
슈만의 가장 내밀한 부드러운 마음을 들려주는 부분이다. 어린이처럼 단순하고 자연스럽다. 중간 부분, 피아노 독주의 반주로 첼로가 노래하는 대목이 특히 아름답다. 첫 주제를 상기시키는 모티브 나온 뒤 휴식 없이 피날레로 넘어간다.
3악장 알레그로 비바체(빠르고 생기 있게).
햇빛 찬란한, 생기 넘치는 피날레다. 첫 주제는 1악장 첫 주제를 변형한 것이다. 2주제는 싱커페이션으로, 3/4박자에서 3/2박자로 넘어가는 복수 리듬을 들려준다.




슈만, 피아노 협주곡 A단조
[ Schumann, Piano Concerto A minor Op.54 ]
이 협주곡은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협주적 완결체를 추구한 작품이며,1845년 여름에 완성, 같은 해 12월 4일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클라라 슈만의 독주로 이루어졌다. 피아니스트로서, 그리고 피아노를 사랑하는 작곡가로서 로베르트 슈만은 젊은 시절부터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을 작곡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케스트레이션 작업에 보다 많은 훈련과 노련함을 필요로 했던 슈만은 자신의 꿈을 구체화하는 데에는 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러한 만큼 결혼 무렵까지 슈만은 피아노 솔로 혹은 피아노를 수반한 가곡을 중심으로 작곡을 했고, 다양한 경험과 모진 시련, 사랑의 결실을 체험한 다음인 1841년 라이프치히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기를 작정한 듯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곡을 작곡했다.

슈만(독일)은 20세 무렵부터 피아노 협주곡 작곡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고 하지만 좀처럼 완성되지 않았다. 1841년에 겨우 1악장 형식으로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을 작곡했다. 또한 1845년에는 이것에 2개의 악장을 더해 3악장 형식의 협주곡을 완성했다. 당시는 리스트(헝가리)나 쇼팽(폴란드)으로 대표되는 화려한 거장 스타일의 협주곡이 성했지만, 슈만(독일)은 그런 화려한 경향을 싫어했음인지, 독자적 기법에 의한 환상성 풍부한 피아노 협주곡을 써냈다. 관현악은 2관 편성이다.
이 작품은 처음에 따로따로 만들었지만, 나중에 합쳐서 한 개의 협주곡으로 완성한 것으로, 1845년 겨울 드레스덴의 음악회에서 부인 클라라에 의해 연주되었다. 공개적으로 초연된 것은 1847년 1월인데, 그 때는 슈만이 관현악을 지휘하고 부인이 피아노를 쳤다. 아름다운 음의 대조, 심각한 인상을 주는 음량과 음색, 피아노와 관현악의 정확한 균형이 있어서 듣는 이에게 큰 감명을 느끼게 한다.



로베르트 슈만 (Robert Schumann, 1810~1856)
낭만주의 음악의 대표적인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로베르트 슈만은 1810년 독일 색스니 주 즈비카우에서 태어나 1856년, 46세에 본 근처에서 죽었다.
슈만은 일생 동안 음악만큼이나 문학에 심취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책에 묻혀 살았다. 아버지는 책을 팔고 또 출판하는 사람이었다. 14 세 때 그는 아버지가 출판하던 책에 원고를 발표했다. 그리고 17세 때는 시를 썼다. 하지만 그를 정말로 열광케 한 것, 그의 말 그대로 그를 미치게 만든 것은 음악이었다.
그는 아주 어려서부터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처음엔 피아니스트가 되려 했다. 일곱 살 때 피아노를 시작했고 얼마 후 작곡에도 손을 댔다. 순탄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작곡이 썩 괜찮은 직업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1826년 아버지가 죽자, 사정은 더 나빠졌다. 어머니는 슈만이 음악 하는 것을 더 불안해했다.
1828년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했을 때 그는 법대생이었다. 라이프치히로 온 지 몇 주 안 되어 그는 피아노 선생을 찾아냈다. 그리고 연습에만 매달렸다.
그 선생 댁에는 어린 딸이 있었다. 그녀 이름은 클라라. 아홉 살밖에 안 됐는데, 이미 장래가 촉망되는 피아니스트였다. 슈만은 같이 피아노를 배우는 한 여학생과 사랑에 빠져 약혼까지 했었다. 그의 초기 피아노 명곡인 '교향적 연습곡', '카니발' 등은 그녀를 위해 쓴 곡들이었다. 하지만 슈만은, 14세의 클라라와 훨씬 더 열렬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역사상 최초로 남녀 두 사람의 진정한 사랑 이야기가 음악 자체로 펼쳐지게 된다. 그것뿐이 아니다. 슈만이 죽은 후 클라라는 슈만의 제자인 브람스와 아름다운 사랑과 존경의 생애를 함께 하게 된다. 클라라는 음악사에 등장하는 가장 아름다운 이름 중 하나이다.
1830년 슈만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1년간 공부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그 곳 법대 교수가 훌륭한 음악가이기도 했다는 것. 1832년에 이르면 어머니도 슈만의 음악을 향한 집념에 두 손을 들게 된다. 슈만은 다시 라이프치히로 돌아와 클라라 집에서 한집안 식구 처럼 살았다. 숱한 음악을 작곡했고 소설에도 손을 댔다. 하지만 그는 무엇보다 피아노 연습을 계속하여 유명한 연주자가 될 생각이었다.
그런데 불행이자 다행인 사건이 일어났다. 1833년 그는 손가락 힘을 강하게 해 주게끔 자신이 고안한 연습 기계를 직접 실험해 보다가 손가락을 다치게 되었다. 피아니스트의 길이 끊기고 작곡에 전념하게 되었다.
1834년부터 그는 <새음악 잡지>라는 이름의 잡지를 정기적으로 펴냈다. 자신이 높이 평가하는 음악과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그는 썼다. 뒷날 이 잡지에 특히 그는 브람스를 소개했다. 이름이 아직도 낯선 청년 음악가 브람스를 그는 '베토벤의 위대한 독일 음악 전통을 이을 대가'라고 소개했다. 과연 브람스는 슈만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또한 슈만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슈만이 빈을 방문하여 슈베르트의 '위대한 C장조 교향곡'을 발견하여 멘델스존에게 건네 준 것은 1838년이다. 잡지 영향력이 점점 커져 갔다. 이 시기에 그는 클라라를 사랑하게 된다. 아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 때 비로소 깨닫는다. 그들의 사랑은 처음부터 운명적인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클라라도 자신을 사모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둘은 금세 뜨거워졌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노발대발했다. 딸이 철없어 보였다. 유명 피아니스트로 키웠는데 기껏 작곡가 지망생과 결혼하겠다니, 그럴 만도 했다. 그가 보기에 슈만은 은혜를 모르는 제자였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싸움이 길고 지리하게, 또 추잡하게 이어졌다. 싸움은 법정으로 비화했다. 스승은 제자를 미성년자 유괴죄로 고발했다. 1840년이 되어서야 둘은 겨우 결혼 승낙을 얻었다. 빈의 한 악기사에서 피아노를 한 대 결혼 선물로 주었다. 이 피아노는 클라라가 내내 쓰다가, 그녀가 죽은 후에는 브람스가 쓰게 되었다.
둘의 결혼 생활은 그지없이 행복했다. 결혼 전에도 클라라에 대한 슈만의 사랑은 숱한 작품들, 특히 피아노 명곡들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바로 그 해에 클라라에게 바치는 사랑의 노래들이 홍수처럼 넘쳐 났다. 두 개의 연가곡집. '시인의 사랑', '여인의 사랑과 생애'라는 그의 대표적인 연가곡집 등 한평생 작곡한 2백 50여 곡 중 절반이 바로 그 해에 쏟아져 나왔다.
극심한 우울증이 슈만을 사로잡는일이 잦아졌다. 1854년 2월부터 그는 환청을 듣기 시작 했다. 헛소리는 때론 감미로운 음악으로, 때론 죽이겠다는 위협 소리로 들렸다. 마침내 그는 라인 강에 몸을 던졌다. 자살 기도였다. 다행히 지나가는 배가 그를 건져 내 목숨을 건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는 정신 병원으로 실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년 후 숨을 거두었다.
그의 평생에 걸친 걸작은 피아노 독주곡들이다. 슈만은 자신의 가장 친밀하고 직접적인 감정들을 피아노 독주곡들을 통해 표현했다. 그 대부분은 물론 클라라에 대한 사랑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동시에, 슈만이 어두운 내면의 고통을 예술로 빚어 낸 것이기도 했다. 그럼으로써 그 고통이 견딜 만하고, 급기야 소중해지게끔 되는 그런 열매였던 것이다.